11월 9일은 소방의 날이다. 화재의 위험성을 일깨우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노고를 되새기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날 소방차는 첨단 장비를 갖추고 신속하게 화재 현장에 출동하지만, 소방 장비와 인력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힘을 모아 불길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유천문화마을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수동식 소방차 ‘완용(腕用)펌프’는 그 시절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흔적이다. 한때 마을 골목의 화재 진압에 사용됐던 이 장비는 현재 마을 한 모퉁이 유리 전시실에 덩그러니 어떤 설명 없이 놓여 있다. 이 전시실을 여러 차례 지나도 이 장비가 1세대 소방차인 완용펌프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1세대 소방차인 완용펌프에는 마을 단위 공동체적 삶을 이야기가 여럿 담겨 있으며, 당시 주민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유천문화마을 조성 과정에서 어느 마을 주민이 마을창고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완용펌프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완용펌프는 사람의 힘으로 물을 뿜어내던 수동식 소방 장비로 우리나라의 1세대 소방차인 셈이다. ‘완(腕)’은 팔을 뜻하는 한자로 여러 사람이 양쪽 손잡이를 번갈아 움직여 펌프를 작동시키는 방식이다. 물을 확보한 뒤 사람의 힘으로 압력을 만들어 화재 현장에 물을 뿜어내도록 했다.   오늘날 소방차처럼 강력한 동력이나 첨단 장비를 갖추지 않았지만, 당시 화재를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장비를 관리하고 운용한 주체는 의용소방대였다. 평소 농사를 짓거나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이 불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화재 현장에 달려갔다. 의용소방대원들이 펌프를 끌고 출동하면 다른 주민들도 양동이에 물을 담아 나르며 힘을 보탰다. 소방서와 소방차가 지금처럼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 마을의 안전은 결국 주민들의 협동에 달렸다. 완용펌프는 단순한 소방 장비를 넘어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도록 했다.   완용펌프가 놓였던 장소는 과거 유천장으로 유명했던 마을의 중심부에 있었다. 장터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인 동시에 사람들이 모여 소식이 오가는 마을의 심장부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출동하려면 소방장비 역시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평소 장꾼과 주민들로 북적이던 공간에 화재가 발생하면 의용소방대원들이 모여 펌프를 끌며 출동했다. 장터의 일상과 화재 현장의 긴박함이 같은 공간에서 교차했던 것이다. 마을 한 켠에 놓여 있는 이 장비는 소방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 상황에서, 과거 지역사회가 재난에 대응했던 방식과 공동체의 역할을 보여주는 중요한 흔적일 수 있다.   ‘유천마을사랑모임(유사모)’ 회장인 허○○은 초등학생 시절 완용펌프가 마을 골목을 지나던 모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불이 나면 의용소방대원들이 펌프를 끌고 현장으로 달려갔고, 주민들이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화재 진압을 도왔다. 이 장비는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실제 마을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사용됐다.” 마을 이장인 신○○는 유리 전시실 안에 놓인 펌프를 가리키며 이를 ‘우리나라 제1세대 소방차’라고 소개했다. “이 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큰데, 그 정확한 제작 연대와 도입 시기를 알 수 없다. 얼마 전 마을을 찾았던 한 방문객이 ‘서울소방박물관’에 똑같은 형태의 펌프가 전시돼 있다고 했고, 이때부터 마을에서도 이 장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완용펌프는 오랫동안 마을창고의 한쪽에 놓여 있었다. 2024년 주민이 장비를 손질하던 중 이 장비를 보게 되었고, 에어건으로 먼지를 제거하다가 표면의 도색이 벗겨지기도 했다. 더 손질하면 오히려 오랜 흔적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작업을 중단했다. 이에 이장과 주민 몇 명이 마른걸레로 조심스럽게 닦아냈지만, 이 과정에서도 도색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아흔 살 노인조차 처음 이 장비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낡은 표면과 벗겨진 도색도 이 장비가 지나온 시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무리하게 복원하기보다는 현재 상태를 정밀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소방의 날을 계기로 완용펌프를 활용한 작은 전시나 해설 과정을 개설한다면 이 마을을 찾는 이들은 물론이며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하는 이들에게 과거의 화재 대응 방식과 공동체의 협동 정신이 왜 중요하며, 나아가 소방이 우리 일상의 삶에 밀접히 연계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비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고, 주민들의 구술 및 관련 자료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소방이 마을 단위의 공동체의 유지 및 존속에 불가분 관련되기 때문이다.   11월 9일 소방의 날, 유천문화마을의 낡은 소방차는 우리에게 묻는다. 마을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았던 사람들의 헌신을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한때 주민들이 힘을 합쳐 끌고 다니던 완용펌프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며 마을 한 모퉁이에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다만, 1세대 소방차인 완용펌프를 통해, 현대적 의미의 소방도 지역민의 적극적 지원 내지 협력 속에서 주민 친화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하며, 동시에 현대인의 눈높이로 이 장비의 의미를 새롭게 재조명해 ‘찾아오는’ 마을 만들기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출처: 2026 유천문화마을 가가호호 문패 스토리 발굴조사 용역, (사)마을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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