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새내기 교사의 극단적 선택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고 있는 가운데 경북의 모 초등학교 교사가 아동심리 상담가이자 금쪽상담소 오은영박사의 육아교육론을 반박하는 글을 게시해 지역사회에 또 다른 화제가 되고 있다. 본지는 학교폭력 문제가 갈수록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교사의 교권 침해 문제 역시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고 보고 이 맘카페에 올라 온 글의 전문 중 일부를 게재한다.(편집자 주)교직 경력이 10년을 바라보는데, 나는 점점 더 무능해지고 있다.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러니까 불과 8-9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땐 선을 넘는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기도 하고, 숙제를 하지 않은 아이들을 남겨 숙제를 시킬 수도 있었다.몇몇 아이들이 “선생님, 저 학원에 가야 하는데요.”라는 말을 하면, “그러게 숙제를 해 왔음 됐잖니. 얼른 하고 가렴.”이라고 말하고, 그 애 부모님께 ‘아이가 숙제를 다 한 후 하교시키겠다’고 통보할 수도 있었다. 그럼 그때까지만 해도, 죄송하다, 알겠다고 하는 부모님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어느 때부터 오은영 박사의 말들이 `육아의 바이블`이 되면서 모든 아이는 무조건적으로 이해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가 됐다.그녀는 아이의 행복과 안정감,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학대라고 말한다. 진의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학부모들은 저 말을 텍스트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학교는 아동학대의 온상이 되었다. (어떻게 한 전문가의 의견을 종교처럼 맹신하는지, 신기하다)학교에서 아이들이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하고, 친구와 갈등이 생겼을 때 서로 양보하게 하고, 나쁜 행동에 대해 지도하고 반성하게 하는 모든 순간은 말하자면 학대다. 특히, 신체도 아닌 ‘정서적 학대’를 들이밀면 교사는 힘이 탁 풀린다. 나는 ‘교육’을 했으나 그 애가 듣기에 그게 고깝게 느껴졌다는데 뭐 어쩌겠나. 그러니 고소를 해도 잃을 것이 없는 학부모는 `아님 말고` 정신으로 신나게 고소를 남발한다.친구를 때린 아이를 혼내는 것은 아이를 불안하게 할 지어니, 지금의 학부모는 ‘남의 자식을 때린 내 자녀를 똑바로 교육시키겠다’라고 하기보다 ‘아니, 우리 애가 때리긴 했는데, 그 애도 놀렸다잖아요. 우리 애 얘긴 들어보셨어요? 우리 애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아세요?’부터 나온다. 놀린 친구도 똑같이 엄히 지도했음을 아무리 설명해도 억울해 한다. 제 아이의 감정과 행복이 너무 중요한 나머지 다른 집 아이도 똑같이 귀한 자식이란 걸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끼리 싸운 후에, “선생님, 쟤도 했는데요.”부터 튀어 나오는 13살짜리 초등학생과 놀라우리만큼 수준이 똑같다.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시키면 아이의 행복을 저해할 것이므로, 학부모는 ‘선생님, 어제 우리 아이가 피곤해서 일찍 잠들어 숙제를 못했는데 혼내지 말아주세요.’라는 문자를 당당하게 보낸다.나는 매년 학부모 총회 때마다, ‘아이이므로 당연히 잘못을 한다. 담임으로서 나는 아이가 자기의 행동에 적절한 책임을 질 수 있게 가르칠 것이다’라고 말한다.고로, 아이는 당연히 지각을 할 수 있으나 나에게 잔소리 한 마디쯤은 들어야 하고, 숙제를 못 해올 수 있으나 쉬는 시간에 자리에 앉아 숙제를 해내야 하며,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물티슈로 운동화 밑창을 박박 닦고 교실에 들어오는 수고 정도는 감수해야 하고,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친구에게 부탁해서 빌리는 번거로움 정도는 겪어야 한다. 나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책임을 지도록 하나, 변명조차 제 입으로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은 기어코 부모의 입을 빌리고, 부모는 기어이 아이의 ‘비빌 언덕’이 되어 줌으로써 아이의 성장을 방해한다.요즘은 대학교에도, 직장에도 본인 대신 부모가 전화를 해서 불만을 토로한다고 하는데, 고백하자면 그 진상의 씨앗은 학교에서부터 무럭무럭 키웠음을 알리는 바이며, 이제 몇십 년이 지나면 사원 엄마와 대리 엄마와 부장 엄마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대리전을 펼칠 것임을 확언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앞으로는 뻔뻔하고 목소리 큰 부모의 자식이 최고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이므로 자기 계발을 하는 대신 각자의 부모님께 발성법을 가르쳐 드릴 것을 권한다.학교 급식에서 먹고 싶은 메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할 것이므로, 지금의 학부모는 `급식에 생선 대신 고기를 넣어달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너무 매워서라면, 영양소 균형이 안 맞아서라면 얼마든지 이해한다. 수백 명이 먹는 단체급식을, 순전히 자기 자식의 기호에 따라 입맛대로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우습다. 이런 어이없는 민원에 “아 네, 그 요구는 못 들어드리겠는데 도시락을 싸서 보내시던가 홈스쿨링 시키시겠어요?”라고 말하고 그날로 교직을 때려치우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다.귀하게 자라 교실에 앉아 있는 스무 명 남짓의 아이들은 저마다 소황제다. 철저히 본인만 귀해서 어떤 학부모는 하다 하다 자기 애가 원하지 않는 친구와 같은 모둠이 됐다는 이유로 ‘울면서’ 나에게 역정을 냈다. 그게 도대체 왜 울 일인가. 내 자식이 그랬다면 나는 아이에게 “모둠은 무작위로 정해진 거니까 그 애가 너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면 불편한 아이랑 어울리는 법도 배워봐야지.”라고 말했을 거고, 그런데도 아이가 떼를 쓴다면 “네가 정 그 애랑 같은 모둠이 되기 싫다면 네가 직접 선생님께 말씀드려.”라고 말했을 거다. (학생과 부모에 따르면 학교폭력은 전혀 없었고, 본인이 ‘꼭’ 하고 싶은 걸 그 친구가 원치 않는다는 게 모둠교체를 원하는 이유였다)이처럼 ‘일부’ 부모들은 자기 애가 상처받는 것을 도무지 참지 못하고 아이가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모든 순간을 극도로 회피하니 교사들은 점점 아이들에게 할 말을 참게 된다. ‘맘대로 해라. 넌 그래봤자 내 자식이 아니야.’를 속으로 되뇌며 심기나 거스르지 않고자 애를 쓴다. 나는 상술한 아이의 모둠을 두말하지 않고 그 애가 원하는 모둠으로 바꿔주었고, 그 해가 다 갈 때까지 그 둘을 같은 분단에조차 배치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에겐 모둠원을 바꾸는 사정을 구구절절 돌려 말하며, 그 애 때문에 모둠을 조정했다는 걸 숨겨주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댔다. 부모가 아이의 성장을 포기하겠다는데 굳이 내가 부모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너는 평생 부모의 바람대로 네 입맛에 맞는 사람들이랑만 살렴.’ 그게 다였다. 그 애는 이 일로,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웠을 거다. 다음 해의 담임선생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아이들은 갈수록 손해를 참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분노를 터뜨리며, 공동생활의 규칙 앞에서 “그냥 하기 싫은데요.”를 떳떳하게 표현한다. 심지어, 고민 해결 시간에 ‘학원에 가기 싫어서 엄마랑 자꾸 싸운다’는 친구의 고민을 듣고, 어떤 아이는 ‘학원에 억지로 보내는 건 아동학대이니 너네 엄마를 경찰에 신고하라’는 해결책을 내놨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실화다. 가진 것이 권리밖에 없는 아이들은 이렇게나 방만하게 큰다. 현재 교사가 빠져 있는 아동학대의 구렁텅이에 곧 부모들도 빠지고 말 거다. 미안하지만 환영하는 바다.미디어와 부모가 만든 강퍅한 아이들로 세상은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으므로, 나는 해가 지날수록 이 나라는 그냥 망해버리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이 이 상태로 어른이 되면 모두가 미쳐버릴 게 뻔하니까.그리고 미쳐버릴 세상의 예고편에 살고 있는 나는 세상보다 한 발 더 앞서 미쳐버렸다.   <중략> 나는 오은영 박사에게, 당신이 만든, 스물이 넘는 소황제를 거느리고 누구의 심기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교육’을 하는 게 가능한지 묻고 싶다. 답을 구한다.오은영 박사의 교육, 아니 치료는 철저히 1인용이다. 그 애가 세상을 혼자 살 거라면 그 애의 모든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마음 구석구석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 애는 어떻게든 사회 속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 금쪽이들의 마음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만 귀한 자식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이 귀하다.학교 선생은 스무 명 이상을 동시에 교육하고 있고, 동시에 아무런 권한도 없다.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속에서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는 나머지 아이들 역시 나에게 똑같이 소중하다.그러니 바라건대, 부모들은 오은영 박사가 아픈 아이를 `치료`하는 방법을 교육기관에 요구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밀착 일대일 케어는 오은영 박사에게 가서 수백만 원을 주고받거나, 집에서 알아서 하면 된다. 더불어 오은영 박사 역시 특수한 아이를 치료하는 방식을 육아의 상식이자 진리인 것처럼 퍼뜨리는 걸 멈춰야 한다. 우리 금쪽이는 이 부분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 금쪽이는 예민해서 그런 거예요. 따위의 변명은 필요 없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 예민한 아이를 감당하는 건 또래 친구들의 몫이 아니며 사회의 몫이 아니다. `내 아이가 예민하니 너네가 이해하라`는 궤변이 어딨는가. 예민하든 말든 결국 사회 속에서 살아갈 게 아닌가.지켜야 할 규칙은 그 애의 감정이 어떻든 지키도록 가르쳐야 하는 게 학교의 역할이다. 그 지도권한은 교사에게 보장되어야 하고 학부모는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든 수업 시간엔 조용히 함으로써 친구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고, 교사가 정당한 지도를 했을 땐 따라야 한다. 그래야 다른 `보통의` 아이들도 행복과 안정감을 보장받고 건강히 성장할 수 있다.오은영 박사가 늘 말하는, ‘알고 보면 너무 불쌍한 금쪽이’들의 방만한 자유를 보장하는 동안 그 옆에서 숨죽이고 앉아 모든 걸 양보하고 감내하고 있는 평범한 아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 건지, 죄송하지만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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