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재 글부터는 수업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교사에게 모든 문제는 수업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모든 해결은 수업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사는 수업을 통해서 가장 큰 상처를 받지만, 또한 수업을 통해서 가장 큰 위안을 얻고, 회복된다. 때때로 수업은 나 하나와 수없이 다른 섬들의 분절이 만든 고독한 섬들의 좌표 같지만 하나의 섬과 수없이 많은 또 하나의 섬들이 무한의 고리로 연결될 때 그 환희와 성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만들기도 한다. 회복하는 존재들의 섬에서 수업을 다루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본다.나의 수업 이야기 1 20세기의 역사를 어떻게 읽어내고 서술할 것인가는 21세기 역사가에게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이듯, 역사 교사에게도 그러하다. 특히 우리 역사에서 20세기 그중에도 초반부의 역사를 다루기는 참 어려운 숙제이다. 21세기가 20세기를 정치적으로 관여하려 할수록 20세기의 역사는 그 독해의 방식과 서사의 맥류가 비장해지고 장엄해지거나 유연성을 잃고 경직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역사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좀 더 자유롭게 흑과 백이 아닌 무지개의 색을 논하기에 오늘의 21세기가 20세기 역사를 읽어내고 서술하는 방식은 너무도 경직되어 있다. (21세기 전체가 아니라 오늘의 시점 대한민국에서의 경직을 이름이다) 비단 그 이유는 21세기가 20세기를 정치적으로 고도로 관여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나의 역사 수업에서도 후유증으로 드러나고 있다. 좀 더 비장해지고, 장엄하게 이어지는 술어와 회색지대를 거부하는 경직성. 혹은 자기 검열의 상흔들. 10여 년 전 좀 더 자유로웠던 그날의 수업과 오늘의 수업 그 역행의 원인은 오롯이 역사 교사 개인의 문제로 그치는 것일까?우리 시대 권력이 지닌 욕망이 너무도 20세기를 못살게 구는 것은 아닌가?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다. 그래서 나의 10여 년 전 수업, 그날의 무지갯빛을 소개하려 한다.2015년 한성과학고 3학년 수업192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모던보이, 모던걸의 일상을 추체험하는 수업을 진행했다. 식민지 경성에서 자유연애를 추종하는 신인류의 일상, 그들로 변신하여 데이트코스를 모둠별로 계획하고 발표함으로써 시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우리의 인식 속에 회색으로 뒤덮인 식민지 시대의 전경에 가려있는 평범하게 존재했던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새로운 색상을 발견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아이들은 그동안 이 시대를 생각하면 회색만 떠올랐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시대의 무게와 사명감에 눌려 어둡고 무겁게만 혹은 기회적이고 이기적이며 변절적으로만 살았을 것으로 생각했던 식민지 젊은이들이, 우리와 너무도 비슷한 열정과 다양한 색상으로 존재했다는 것에 묘한 신기함을 표했다.조선호텔에서 커피 한잔과 봉지 통닭(발표자는 통닭을 아주 좋아하는 조원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강력한 주장이 반영되었다고 서두에 이야기했다)으로 아침을 시작한다는 이야기와 하루 종일 데이트하기 위해 박리로 인력거를 전일 렌트(인력거꾼에 대한 노동착취가 아니냐는 논란이 진행되었다. 모던보이의 갑질일 수 있다는 비난이 무성했다.) 한다는 이야기, 꽃무늬 난방에 분홍색 나팔바지를 입고, 마르크스의 책을 옆에 끼고 명동거리를 활보한다는 이야기, 인력거를 타고 연희전문으로 가 윤동주를 만나 라이브로 그의 시를 듣는다는 이야기, 데이트를 위해 손탁호텔에서 경양식을 먹었는데 양이 부족해 집에 돌아와 경성의 패스트푸드 설렁탕을 시켜 먹는다는 이야기 등등. 처음에 주저주저하던 아이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대와 맞지 않는 발칙한 생각들도 많았다.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의열단 소속의 여자와 친일파 아버지를 둔 남자의 비극적인 마지막 데이트였다. 남자는 여자의 실체를 모른 체 사랑에 빠졌고, 자유로운 연애를 하며 모던보이의 전형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잠시간의 이별을 고한다. (여자는 김원봉으로부터 친일파인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종로 경찰서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남자는 마지막 데이트를 위해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선물로 줄 만년필과 양산을 산다. 밤에 사랑의 편지를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다 친구인 동주에게(아마도 윤동주일 것이다) 도움을 요청해 완성한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대문에 있는 서책 방에 들러 매번 여자친구가 읽고 싶다고 했던 엘렌 케어의 책(나눠준 읽기 자료에 있었던 이야기를 인용한 것 같다)을 구하고 종각에서 여자친구를 만난다. 점심으로 경성의 패스트푸드 설렁탕을 먹고 나운규의 영화를 본 후(여기서 발표자가 던진 의문 때문에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지,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지에 대한 논란이 발생했다.) 삼청동 길에서 데이트하고 종로 경찰서 앞에 도착한다. 예정된 시간이 온 것이다. 여자는 담담한 눈망울로 이별을 고하고, 둘은 헤어진다. 곧 계획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을 시행한다. 돌아서 가던 남자는 편지를 전하지 못한 것을 깨닫고 다시 종로 경찰서로 향한다. 폭탄 투척 계획은 실패하고 여자는 종로 경찰서의 경찰관인 남자의 아버지에게 쫓기는 상황이 된다. 무대는 종로 아버지와 여자친구 사이에 묘하게 대치한 남자는 갈등하게 된다. 마침 그에게는 총이 손에 쥐어졌다. (여기는 뭔가 구성이 기괴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하기로 했다) 무엇인가 결단을 내린 듯한 눈빛으로 주변을 주시하던 남자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활극을 펼친다. 아버지의 적이 되어 여자를 탈출시키기 위한 그의 활약은 신출귀몰했다. (이 이야기는 전 시간에 배웠던 김상옥의 이야기를 차입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보호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버지의 총탄에 목숨을 잃는다. 순간 아버지도 숨어있던 의열단 저격수의 총탄에 죽음을 맞이한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운 남자는 모두를 잃게 되고, 그는 마지막 남은 한발의 총알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눈다. 종로의 황혼이 올 무렵, 마지막 데이트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동주가 써준 편지만 바람에 나부끼며. 모든 것은 그렇게 어둠으로 사라져 버렸다.발표는 아주 장엄하고도 쓸쓸한 비극으로 끝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잘 구성한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예상한 결과보다 훨씬 적극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무사히 여러 반의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이들이 1920년대의 데이트코스를 작성할 때 어려워했던 부분이었다. 나는 마땅히 1920년대의 시대상을 잘 몰라 힘겨워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자료와 영상들을 준비하려 했다.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은 데이트를 계획하는 것을 낯설어했고, 어려워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하긴 나에게도 아주 낯설고 난감한 것이 이것이긴 하다.그리고 한 아이가 이건 전제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데이트를 할 사람이 없는데 데이트코스를 작성하라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더 시급한 것은 데이트할 사람을 만드는 것부터일 테니. 또한 그것에 대한 난감함이 더 클 수 있을 테니. 한바탕 웃었지만 뭔가 쓸쓸하고도 장엄한 여운이었다.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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