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메논은 “행해진 것”이라 불려지고 있으며 예술과 제의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어떤 충동(impulse), 즉 욕망의 대상이나 욕망의 행위를 재현함으로써, 즉 그것을 만들거나 행하거나 장식함으로써 강렬하게 느껴지는 정서 및 그런 욕망을 표출하고 나타내려는 욕망에 있다.-Jane Harrison드라마의 어원인 드로메논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종교 제례인 엘레시우스제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지칭한다. 엑스터시의 순간을 기획하는 몸의 작용인 드로메논을 통해서 인간은 카니발이라는 축제의 시공간을 통로로 삼아 일상의 억압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공동체 내부에서 촉발했던 적개심의 해소, 세계 내 현실의 부조리적 사태에 대한 의도적 망각, 절망적 상황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투사와 승화의 방식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극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때 모든 순간은 상상이라는 세계와 접촉하게 되고, 자아가 포획되지 않는 시공간에서 인간은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드로메논은 바로 그러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자기 속임을 행했던 인간의 자구책이었다. 물론 이 사이에는 상당한 지배의 정치공학이 내재해 있고, 속임과 속음의 변증법적 관계가 주종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실존과 예술적 약동에 대해서만 언급한다면, 그러한 자기 속임은 분명 인간에게 필요로 되었을 것이다.여기 뭉크의 글이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절규`라는 작품이 나오게 되었던, 어느 날 밤 뭉크의 내적 충동에 관한 글이다."나는 두 사람의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고, 약간 우울한 기분이었다. 돌연 하늘이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나는 멈추어 서서 난간에 매달렸다. 피곤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피처럼 칼날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이 보였다. 바다와 곶은 푸른색을 띤 검은색이었다. 친구들은 계속 걸어가 버렸다. 나는 거기에 멈추어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자연을 관통하는 커다란 절규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들었다.-뭉크의 일기   뭉크 또한 절규를 통해서 드로메논의 단계로 전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몸부림, 치가 떨리는 단절과 새로운 세계로의 도약, 그리고 중단된 일상. 거짓 세계를 향한 엑소더스, 그의 그림에는 그러한 충동과 열망이 가득하다. 내가 그의 그림을 볼 때 때때로 공감이라는 차원의 전율, 함께 이탈하는 동지적 유대를 느끼곤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주 그의 발자취를 뒤쫓곤 한다. 그때 나는 아주 불온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뭉크의 그날 밤처럼 나 또한 그러한 욕망과 충동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경계에 머물러 있었을 뿐, 어떠한 충동의 이끌림에도 흠뻑 빠져들지 못한 채 배회했을 뿐이다. 일종의 대리만족을 위한 타락의 발자취만을 따르며, 내게도 극적인 몰입, 단절의 순간이 필요로 되었을 텐데도 말이다. 드로메논에서 드라마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일상의 중단과 상상과의 마주침, 그리고 배설과 몰아의 지경, 드라마 또한 드로메논의 그 기능성을 유사하게 이어받았다. 그래서일까? 가끔 나는 드라마에 자주 빠져들곤 한다. 물론 그때에는 철저한 속아짐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항상 그 경계에서 머물고 만다. 그래서 한껏 놀지 못한 채 불쾌한 진실 속으로 회귀하고 말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통해 나는 무엇인가를 배설하고자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드라마의 비현실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지극히도 무관심했었고, 무매개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드라마일수록 더욱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리얼리티의 함정을 벗어난 철저한 허구성의 기획, 최근 대중들이 선호하는 드라마 또한 만화와 같은 상상력이 지배적이다. 아마도 현실이 연출하는 억압의 정도가 상당히 강해서 오는 반작용들일 것이다. 일상의 중단, 가능한 덜 매개적인 스토리, 판타지 속에서 현실에 포획되지 않고 존재하는 대리 자아, 그 과정에서 오는 해방감을 기획하는 드라마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나 또한 그러한 추세에 영합하려는 기질이 다분하다. 철저한 이탈감, 그리고 일상의 중단과 그곳에서의 해방감, 그것이 분명한 거짓일지라도, 순간만큼은 그것을 선호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과 매개성이 희박할수록 더 매력적이다. 제례 의식은 바로 이러한 이탈감의 극적인 기획이다.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 순간 연출되는 단절이라는 공간에서의 자유로움, 그리고 무매개적 종결. 물론 회귀라는 거대한 현실성이 뒤따르지만 적어도 순간 속에서 인간은 해방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 또한 제의의 드로메논적 해방감을 연출할 때 그 매력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인간은 이처럼 현실 세계의 금기에서 벗어나, 거대한 열망을 다양한 장을 통해 연출한다. 그것은 소유가 아니라 만남이며 놀이이다. 모든 예술, 특히 퍼포먼스적 예술은 이러한 놀이성에 기반한다. 바로 이것의 가장 극적인 매력은 속아 넘어감에 있다. 그 속아 넘어감의 주체는 자기 주체의 결단에서 기인한다. 속고 속이는 것이 스스로의 결단에 기인하며 그 책임 또한 그렇게 회귀 된다. 언제나 두려움은 회귀의 속성에서 촉발되고 다시 그 속성과 단절하며 휘발한다. 제의의 지속성은 바로 이러한 회귀와 휘발에 근간하는 것이며, 지배의 용례 또한 이러한 인간성에 기반했던 것이다. 인간에게 자율적 판단이 주어졌을 때 결국 가장 큰 불안이 동반되었던 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회귀성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 불안은 ‘속임’의 판단을 통해 휘발되기도 한다. 인간이 진리를 희구하는 만큼 거짓에 매료되는 이유 또한 그것에 있다고 생각한다.드로메논은 철저한 거짓에 기반하며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에 의한 속임의 순간이다. 일상성의 중단, 누구나가 함께 거짓일 수 있는 진리의 무매개성, 도덕적 판단이 중지되는 그러한 해방구를 속임과 속아짐을 통해 인간은 철저하게 구축하려 했던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은 욕망이라는 그 불온함의 흔들어 댐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회귀성이 명확한 포획도구로 변전할 때, 인간은 지속적인 불온함에 시달리게 된다.확실한 해방구가 없는 상태. 사실과 거짓이 모호한 현실, 불안은 바로 그곳에서 강하게 발생한다.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그 불명확한 선택의 책임을 고스란히 져야 하는 인간의 존재 상태. 어느 하나도 명확한 거짓일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결국 자유의 비극에 포획되고 마는 것이다. 비극에서 탈출하는 데 필요했던 것은 철저한 속임의 상태였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종교 제의였을 테다.제의가 끝이 나고 그 자리를 대리했던 것은 아마도 예술이라는 놀이의 시공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했던 해방구 그 핵심은 놀이이다. 호모 루덴스를 복원시키려 했던 호이징가의 기획처럼, 인간이 일상을 중단하고 상상의 세계와 접촉하는 해방구가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해방구는 소유적 관계에서 벗어난 만남의 공간, 철저하게 기획된 상상의 세계, 그 무엇에도 포획되지 않은 자아의 활동, 바로 그러한 욕망의 결집체여야 하며, 그것이 바로 호이징가가 이야기했던 놀이의 속성이며, 호모 루덴스의 삶의 양식인 것이다. 놀이가 해방구가 될 수 있으려면 철저하게 속을 수 있는 자아의 상태가 필요하다. 철저하게 거짓인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포획되지 않는 자아, 그러한 마음가짐의 상태가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그 경계에 서서 전전긍긍하며 불안해하는 일상성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 바로 속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그래서 인간의 불안에 대해 가장 깊이 고찰했던 키르케고르는 그의 저작 곳곳에서 다음과 같은 금언을 인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속는 자가 속지 않는 자보다 더 현명하다.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