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청암’은 ‘박태준 선생’이다
2. 포스코청암재단의 뿌리는 제철장학회이다
3. 박태준 선생이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맡다4. 최정우 회장 때 포스코청암재단은?5. 장인화 회장은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도 맡을까?6. 정명(正名)과 정위(正位)도 실천할 때이다
1. ‘청암’은 ‘박태준 선생’이다
포스코청암재단에서 ‘청암’은 ‘박태준’을 뜻한다. 1968년 4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포스코(포항제철)를 이끌었던 박태준 선생의 아호(雅號)가 청암(靑巖)인 것이다. 요즘은 거의 사라졌으나 선생 세대에도 지인끼리는 조선의 선비들처럼 실명보다 아호로 부르곤 했다.포스코청암재단은 2005년 9월 이사장을 직접 맡은 이구택 포스코 회장의 발의로 탄생한 재단이고, 그 뿌리는 박태준 선생이 1971년 11월 포항제철 사장으로서 설립한 ‘제철장학회’이다. 이래서 선생의 부인 장옥자 여사나 창업요원은 포스코청암재단을 습관적으로 ‘장학회’라 부른다. 나는 포스코청암재단 설립 당시에 사외이사로 참여했다. 포스코경영연구소에 재직 중이었는데 무엇보다 <박태준 평전>을 쓴 작가 자격이었다. 최광웅 상임부이사장(포스코 부사장 출신)이 출범의 일들을 치밀하고 성실하게 수행했다. 홈페이지에 걸어둘 콘텐츠를 비롯해 온갖 글쓰기는 물론 내가 즐거이 떠맡았다.그때 청암의 영어 표기는 Cheongam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반대했다. T.J.Park 또는 Taejoon Park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단 명칭에 ‘박태준’을 넣자니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워 청암이라 했을 거라는 짐작을 했거니와, 영어 표기라도 제대로 해야 옳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 의견은 살아남았다.비슷한 사례는 이미 있었다. 2011년 12월 박태준 선생 서거 직후,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구택 전임 회장이 그랬듯 포스텍 이사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겸임)의 주도로 포스텍에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선생의 실명을 붙였으나 그 존함에 부끄러운 초가집 신세였음에도 도리어 웅장한 창립발기문을 써준 나는 포스텍 청암학술정보관 안에 위치한 연구소에 자문하러 드나들었다. 청암학술정보관은 2001년 유상부 포스코 회장(포스텍 이사장)의 뜻으로 착공해서 2003년 4월 이구택 회장 때 준공했다. 다만, 포스코 명예회장이며 포스텍 설립이사장인 박태준을 박태준이라 못하고 청암이라 했다. 나는 영어 표기로는 T.J.Park이라 해야 옳다는 주장을 피력했고, 현판 같은 돌에 그렇게 새겨졌다. 이랬던 청암학술정보관이 ‘박태준학술정보관’이라는 정명(正名)을 얻은 때는 2012년이었다. 박태준추모사업위원회에서 내가 발의한 의견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던 것이다. 2. 포스코청암재단의 뿌리는 제철장학회이다1970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의 품에 처음으로 덩치 큰 공돈이 굴러들었다. 보험회사 리베이트 6천만원. 포항 1기 건설이 시작돼 영일만으로 들어오는 고가 설비에는 규정상 거래하는 양측이 다 보험을 들어야 했는데, 그게 뜻밖에도 큼직한 금덩어리로 굴러든 것이었다.박 사장은 임원들과 의논하여 대통령 통치자금으로 드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공화당 재정담당이 정치자금 내라고 포철 경영진에도 계속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에서 부담 없는 공돈이 생겼으니 체면치레는 될 것 같았다.“나라를 위해 쓰시라고 기부금 좀 가져왔습니다.”박 사장이 6천만원짜리 수표를 박정희 대통령 앞에 놓았다.“포철은 절대 정치자금 안 낸다고 한 사람이 왜 이래?”의아하게 쳐다보는 대통령에게 그가 돈의 성격을 설명했다.“임자는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야. 가져가서 필요한 일에 마음대로 써.”대통령이 미소 지으며 탁자 위의 봉투를 도로 밀었다.“제가 쓰기엔 너무 많은 돈입니다.”“임자 스케일이 그렇게 작아? 떡을 사먹든 술을 사먹든 맘대로 해. 내 선물이라고 생각해.”포항으로 내려온 박 사장은 임원회의를 열었다.“우리 회사의 주택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으니, 하나 남은 중요한 과제는 우리 사원 자녀들의 교육문제요. 앞으로 사원이 대폭 늘어나고 젊은 사원이 나이 들어가면 무엇보다 자녀교육이 회사의 중요한 복지과제로 떠오를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이걸로 제철장학재단을 설립하면 어떻겠소?”모두 흔쾌히 동의했다. 1970년 11월 5일 포철 회의실에서 ‘재단법인 제철장학회’ 설립이사회가 열렸다. 박태준 이사장은 원대한 포부의 한 자락을 내비쳤다.“오늘 조촐하게 출발의 첫걸음을 내디디지만, 장차 우리 사원들에게 최고의 교육시설과 장학혜택을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국가 장래와 교육을 연결시키는 철학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하여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숨은 역량은 교육을 통해서만 계발되는 것입니다.”‘박정희와 박태준’이 국가대업(포항제철)의 대의(大義)에 얼룩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탄생할 수 있었던 제철장학회가 1971년 9월 가장 먼저 유치원을 세웠다. 그리고 포철의 성장과 사원 자녀의 성장이 거의 일치함에 따라, 박 사장은 1976년 9월 별도로 ‘학교법인 제철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학교들을 차례차례 세워 나갔다. 1980년대 중반쯤에 포항의 직원들이 대거 옮겨간 광양에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거의 한꺼번에 세우게 되고….박태준 사장은 포철을 건설하면서 ‘제철보국’을 부르짖었듯 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육보국’ 기치를 내걸었다. ‘교육은 천하의 공업(公業)이며 만인의 정성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그의 교육관이 유치원, 초등, 중등 교육을 넘어 마침내 1986년 12월 한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 포스텍을 개교하면서 20세기 한국 교육계에 새 지평을 열어젖혔다.한편, 1985년 제철장학회 박태준 이사장은 ‘특별한 인재양성’ 사업을 결심했다. 자연과학, 공학, 사회과학 분야의 우수한 학사학위 청년들을 선발해 해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5년간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지원해주되 환율 변동에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장학제도였다. ‘박사학위 취득 후 포철을 위해 무엇을 해줘야 한다’ 따위의 구질구질한 조건은 한마디도 달지 않았다. 1985년부터 1994년까지 모두 71명을 지원했다. 국가별로는 미국 25명, 영국 8명, 일본 15명, 독일 13명, 프랑스 9명, 중국 1명 등이었다. 이들 71명은 2015년 10월 기준으로 67명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67명 중 51명은 귀국해서 교수, 연구원, 기업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3. 박태준 선생이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맡다2008년 5월 하순의 어느 이른 오후, 서울 광화문 파이낸스센터 11층 포스코 명예회장 사무실. 이구택 포스코 회장(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과 포스텍 이사장 겸임)이 박태준 선생을 찾아왔다. 선생과 차담을 나누고 있던 나도 자리를 지켰다.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맡아 주십시오. 연봉 책정도 많이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고는 환히 웃는 후배의 얼굴을 선생은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래서 ‘순수하게 봉사하는 이사장’을 맡았다. 이때도 나는 포스코청암재단 사외이사였다. ‘이사’라니까 연봉도 많이 받는다고 시샘하는 눈초리가 없지 않았으나 한 해에 두세 차례 회의비나 받는 자리였다.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수락한 박태준 선생은 며칠 지나지 않아 ‘베서머재단’을 통합해야겠다고 판단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영광의 계절’을 지나갔던 선생은 1987년 5월 영국금속학회에서 선정하는 ‘베서머 금상’도 수상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두 번째 영광이었다. 이를 기념해 지인들이 ‘베서머상수상기념재단’을 만들었다. 베서머재단은 청산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2008년 12월 마지막 이사회를 열어 기금 25억4천만원 전액을 포스코청암재단에 증여한다. 2008년 6월 16일 박태준 선생은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 취임 공식절차에 이어진 회의시간에 지론 하나를 내놓았다.“일본은 이미 과학분야에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우리나라는 한 명도 없어요.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무엇보다도 과학정예인재를 길러내야 합니다.”과학정예인재 육성과 지원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선생의 제안을 포스코청암재단이 ‘청암과학펠로’라 명명한 사업으로 구체화했다. 최광웅 부이사장이 주도했다. 2009년부터 시행한 청암과학펠로 선발 분야는 수학,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등 기초과학으로 한정했다. 젊고 뛰어난 우리 기초과학계 인재들을 지원하는 사업에는 당연히 한국 과학기술의 세계일류를 희원하고 한국인의 노벨과학상 수상을 염원하는 박태준 선생의 소망과 정신이 투영돼 있었다. 선생은 자신의 뜻을 한 문장으로 표명했다.“철강산업이 국가기간산업인 것처럼, 기초과학은 과학기술의 국가기간학문이다.”2011년 기준으로 청암과학펠로는 박사과정 10명, Post-doc 10명, 신진교수급 10명 등 한 기에 30명을 선발했다. 박사과정 한 사람마다 연간 2천500만원씩 연속 3년간, Post-doc 한 사람마다 연간 3천500만원씩 연속 2년간, 신진교수급 한 사람마다 연간 3천500만원씩 연속 2년간을 각각 지원했다. 매년 5월에 선발 공고를 내고, 8월부터 해당 학계의 권위 높은 교수들이 엄정히 심사를 해서, 10월 하순에 증서수여식과 워크숍을 개최했다.2011년 늦가을의 청암과학펠로 3기 증서수여식에 박태준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참석했다. 이때의 격려 말씀은 마치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온 회한 같았다.“산업화에 매진한 우리 세대는 실용적인 과학기술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뛰어야 했고, 그것이 효율성 측면에서 큰 장점을 발휘했지만,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이 요구되는 기초과학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남겼으며,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 영향이 우리의 잘못된 풍토로 남아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고 그 속에 숨은 원리와 법칙을 찾아내는 과학자의 길이 부자가 되려는 길은 아니지만 인류사회의 고귀한 가치를 창조하는 길이니 그 자부심, 그 사명감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등불로 빛나기를 바랍니다.” 2011년 12월 13일 오후 5시 20분, 국내외 언론들이 긴급뉴스를 보도했다. 박태준 타계, 향년 84세. 세계 최고의 철강인, 강철거인, 교육위인이 홀연히 떠나갔다. 포항시민, 포스텍 사람들, 퇴역 포스코 사람들 2만2천905명이 성의를 모은 ‘박태준 전신 조각상’이 포스텍 노벨동산에 막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받침돌에 새긴 건립취지문을 썼다.<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이 신념의 나침반을 따라 헤쳐 나아간 청암 박태준 선생의 일생은 제철보국 교육보국 사상을 실현하는 길이었으니……>한편, 빈자리로 남겨진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은 정준양 포스코 회장(포스텍 이사장 겸임)이 이어받았다. 4. 최정우 회장 때 포스코청암재단은?2018년 4월, 문재인 정부 2년차. 이제 막 포스코 회장 연임 임기를 시작한 권오준 회장도 전임 두 회장이 그랬듯 포스텍 이사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연임 임기를 겨우 1개월밖에 못했다. 널리 알려진 소문에 따르면, 정권이 밀어낸 것이었다.그런 다음에 뜻밖의 인물로 등장한 포스코 회장이 최정우였다. 그는 전임 이구택, 정준양, 권오준 회장이 그랬듯 포스텍 이사장을 겸임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맡지 않았다. 외부 인사를 앉혔다.누가 추천했을까? 그때 청와대의 누군가가 강추했을까, 아니면 최 회장이나 주변의 누군가가 천거했을까? 새로 나타난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은 프로필을 살펴봐도 포스코나 청암(박태준)과 무관해 보였다. 노무현 정부 때 법제처장을 지내기도 했던 법학과 교수 출신이었다.거대한 거울은 수많은 사물을 한꺼번에 다 비춰줄 수 있다. 그런데 조그만 손거울은 ‘나쁜 얼굴’ 하나를 확실히 잡아서 또렷이 비춰주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그의 코털까지 보여준다. 또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금언(金言)도 있지 않는가. 이 경우의 ‘하나’가 바로 ‘손거울’ 같은 것이다. 2022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정말 우연히 ‘청암과학펠로’라는 명칭이 ‘포스코사이언스펠로’라고 바뀐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본디 명칭으로 되돌렸는지 그대로인지 모르겠다(포스코청암재단이 보내준 소식지에서 그것을 발견한 때부터 나는 그 재단에 대한 모든 관심을 싹둑 잘라버렸다). 다른 모든 사람은 모르겠으나, 방금 앞에서 알렸다시피, ‘청암과학펠로’라는 포스코청암재단의 대표적 사업이 탄생한 과정, 그 척추를 형성한 박태준 선생(이사장)의 철학과 신념을 잘 아는 나는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차라리 그때 ‘청암과학펠로’라 하지 않고 ‘박태준과학펠로’라 해뒀더라면 ‘박태준’을 ‘포스코’라 바꾸기가 좀 더 버거웠을 텐데, 이런 한심한 후회마저 스쳐지나갔다. 5. 장인화 회장은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도 맡을까? ‘박태준 지우기’를 도모하여 비난을 받았던 최정우 회장이 물러나고 일 년쯤 지났다. 그의 뒤를 이어받은 장인화 회장은 포스텍 이사장을 맡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 법제처장 출신의 현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이 임기 종료를 저만치 앞둔 모양인데, 장 회장은 어떤 선택을 할까? 포스텍 이사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함께 맡았던 이, 정, 권 회장처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도 겸임할까? 그런데 포스코 경영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다. 2022년 이맘때 포스코홀딩스를 출범시키며 철강을 압도할 것이라 했던 이차전지소재 주력의 포스코퓨처엠부터 바닥에 엎드리게 되었다. 힌남노 수해 후유증과 중국산 철강공세가 설상가상으로 포항제철을 억눌러 철강 본업의 체력이 허약해진 터에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5% 관세 폭탄마저 떨어졌다. 응급책은 ‘고강도 구조조정’이다. 중국에 세운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장가항포항불수강)부터 포항시 효자동 웰빙아울렛이 깔고 앉은 토지까지 60개 또는 120개 이상의 사업장과 부동산을 처분할 것이라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장인화 회장은 차라리 비상사태라도 선포하고 싶은 심정인지 모른다.위기상황이든 비상사태든 극복은 사람들이 해낸다. 여기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이 정신적 재무장이다. 푸틴의 러시아 군대가 하루아침에 먹어치울 거라는 세계인의 예단을 쓰레기통 속으로 처박아버린 우크라이나 국민, 이 부패해 있던 국가의 허약해 보인 군대가 저토록 용맹하고 장렬하게 침략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첫째 조건도 결연한 리더십과 함께 똘똘 뭉친 정신적 재무장이었다.장인화 회장은 고심을 거듭하여 구조조정의 장검을 빼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결연한 리더십인가? 구성원들의 정신적 재무장이 이뤄지고 있는가? 그래서 ‘위대한 포스코’를 복구할 길이 열리고 있는가? 이것이 문제로 남았다. 포스코의 정신적 재무장이란, 숱한 위기를 극복하며 ‘위대한 국민기업 포스코’를 성취해놓은 ‘박태준 정신’을 학습하고 토의하면서 세대와 시대에 걸맞게 응용도 해내는 집단지성으로 무장하는 일이다.장 회장은 비상경영 때문에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직접 맡기 어려울 수도 있고, 좌고우면 없이 직접 맡을 수도 있다. 다만, 위기극복의 집단지성 무장에는 어느 경우가 더 도움이 될까? 맡든 안 맡든 결정적 변수는 아닐 테지만.6. 정명(正名)과 정위(正位)도 실천할 때이다만약 장인화 회장이 이번 기회에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지 않고 포스코나 박태준 선생과 인연을 쌓은 외부의 덕망가를 이사장으로 초빙해오고 앞으로 그것이 정례화 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정명(正名)의 정립을 동반해야 옳다.청암을 영어로만 T.J.Park이라 표기하는 게 아니라 한글과 한자로도 ‘박태준(朴泰俊)’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아예 재단 명칭을 통째로 ‘박태준기념재단’이라 고치면 더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 박태준 선생이 세계적 일류기업 포스코로 육성하는 대성취에서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1%는 기여했을 텐데, 선생은 공로주마저 단 1주도 받지 않고 사원들에게만 ‘우리 사주’ 10%를 배분해줬다. 스톡옵션, 스톡그랜트 따위는 꿈결에도 기웃거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회적 자산인 포스코청암재단에 지금쯤 ‘청암’을 빼고 ‘박태준’을 넣거나, 더 나아가 ‘박태준기념재단’이라는 명칭을 선물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마냥 칭송받을 예의가 아니겠는가? 포스코박태준재단이 되든 박태준기념재단이 되든 주력 사무실을 주소지로 옮겨야 마땅하다. 정위(正位)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외이사로 참여했을 때 포스코청암재단의 주소지는 포항으로 경북교육청 관할이었고(현재도 그러한지 모르겠다), 주력 사무실은 서울에 소재했다.적어도 포스코청암재단을 포스코박태준재단이라는 정명으로 정립하거나, 더 나아가 박태준 선생의 영전에 뒤늦게 공로주를 챙겨 드리는 심정으로 예의와 존경을 담아 박태준기념재단으로 개명한다면, 그 정위에 대해 나는 포스텍 캠퍼스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정례적으로 포스코 외부 인사를 이사장에 초빙한다고 가정해보면, 학문과 덕망이 높은 포스텍 교수 출신을 모셔오면 되지 않겠는가.정명과 정위의 실현, 이것도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실 중 하나다. 오늘 우리가 감내하고 있는 탄핵정국이 또다시 보여주겠지만, 언제나 사필귀정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도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으랴. 박태준 선생은 사필귀정을 넘어 천하위공(天下爲公)의 길을 모범적으로 완주했다. 마땅히 선생의 정명을 기리는 재단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