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2019년에 개봉된 엄유나 감독의 영화 〈말모이〉에 나오는 대사다. 잘 알다시피, 이 영화는 일제 말기 암흑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수호하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작업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 사전편찬작업은 애초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에 의해 추진되던 것이었으나, 1914년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단절된 염원이 이후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로 이어졌을 정도로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주시경 선생의 뜻은 다시 이어져 한글 맞춤법 통일안, 표준어 사정안 등으로 가시화되는 듯했으나, 뜻하지 않게 일제에 의해 발각됨으로써 좌절되고 만다. 바로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대거 검거한 사건, 즉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전편찬작업을 감행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가한 민족말살정책에서 연유하였다. 이 민족말살정책은 말 그대로 한국이라는 국권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아예 한국인의 뿌리와 정체성 자체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제는 1938년부터 학교에서 조선말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1939년이 되면 창씨개명, 즉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제 가족이 만들어준 내 이름도 버려야 하고,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말과 글마저 쓸 수 없게 되었으니, 과연 우리 민족이 발 디딜 곳은 어디란 말인가. 아마도 조선어학회의 회원들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민족 최후의 보루로서 말과 글을 지키려고 했던 건 아닐까.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우리의 말과 글을 자유롭게 쓰고 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중단된 사전편찬작업은 기적과 같은 계기로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일제에 의해 압수된 사전 원고가 해방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원고는 다시금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후신)의 손을 거쳐 1947년 우리나라의 첫 대사전인 《조선말 큰사전》 1권의 결실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앞서 언급한 〈말모이〉에서 흥미진진하게 그려지고 있으나, 정작 우리가 이 영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작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 바로 이름 모를 민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에서는 기관지 《한글》에 “각 지역의 ‘말’을 모아주세요.”라며 사투리 모집 광고를 낸 바 있다. 우리나라의 표준어를 정립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쓰는 방언을 사전에 삽입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편지 제보가 잇따르는 등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쓰던 방언이야말로 살아 있는 언어라고 여겼을 것이고, 바로 그 순간 자신이 쓰는 언어를 통해 진정한 자기의 정체성을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을 아래의 시에서 마주할 수 있겠다.   네게는 불멸의 향기가 있다.네게는 황금의 음률이 있다.네게는 영원한 생각의 감초인 보금자리가 있다.네게는 이제 혜성같이 나타날 보이지 않는 영광이 있다.너는 동산같이 그윽하다.너는 대양같이 뛰논다.너는 미풍같이 소군거리다.너는 처녀같이 꿈꾼다.너는 우리의 신부다.너는 우리의 운명이다.너는 우리의 호흡이다.너는 우리의 전부다.아하, 내 사랑 내 희망아, 이 일을 어쩌리,네 발에 향유(香油)를 부어 주진 못할망정,네 목에 황금의 목걸이를 걸어 주진 못할망정,도리어 네 머리에 가시관을 얹다니, 가시관을 얹다니……아하, 내 사랑 내 희망아, 세상에 이럴 법이……우리는 못났구나 기막힌 바보로구나.그러나 그렇다고 버릴 너는 아니겠지 설마,아아, 내 사랑 내 희망아, 내 귀에 네 입술을 대여 다오.― 김동명, 〈우리말〉, 《하늘》, 문륭사, 1948 이 시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우리말이 ‘너’라고 하는 인격체로 나타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통상 우리말을 태어나면서 익힌 언어, 즉 모국어(母國語)라고 부른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는 별반 특별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볼 법하다. 하지만 시에서 우리말은 어머니의 위상을 가지지 않고, “처녀”, “신부”라는 시어에서 드러나듯 연인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사랑스럽고도 고귀하다. 시의 1연에서 3연까지는 그 연인의 인격에 관한 시적 주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1연에서는 네게 속해있는 품격들이, 2연에서는 너의 갖가지 동작과 상태가, 3연에서는 너와 우리의 관계적 의미들이 반복적 구조를 통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장차 사회적 존재로서 연인을 형성하기에 앞서 문화적 존재로서 연인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누구나 오래된 연인 한 사람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두 사람의 단독성이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이듯이, 오래된 연인과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말과 정서적 친밀감을 더해가면서 좀 더 찬란하고 생동하는 생각과 정신의 아이들을 낳거니와, 불투명한 이 세계 속에 우리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세우는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내 사랑 내 희망”에게 “발에 향유”를 붓는 섬김과 “목에 황금의 목걸이”를 걸어 주는 정성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다시피, 일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억지로 떼어놓으려 하고 있다. 사랑과 이별은 결국 인간의 주체적 선택의 몫이기에 그에게 이러한 외부적 개입 자체는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그러면서도 그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그의 자세는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그는 우리말에 이어 우리글에 대한 연가도 쓰고 있다. 다음은 〈우리글〉의 일부다.너는 우리의 명예다.너는 우리의 자랑이다.너는 동방 문화의 여왕이다.너는 도야지 앞에 던져진 진주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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