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오래된 꿈지극히 뻔한 말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월을 거스를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누구나 나이를 먹지는 않는다. 그건 제대로 나이를 먹기 위해서는 일종의 심리적인 장치가 요청되기 때문이리라. 그 하나의 일로 우리가 지금의 나이로 오기까지 과정을 돌이켜본다면, 좀처럼 실감이라는 말에 들어맞지 않는 어떤 아득함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물론 거기에는 기쁨, 보람, 후회, 안타까움 등과 같은 갖가지 감정이 착종되어있다. 다른 하나의 일로 우리가 지금의 나이에서 나아갈 여정을 내다본다면, 계획과는 어긋나기 마련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떤 막막함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기대, 설렘, 불안, 걱정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다. 바로 우리가 지금의 나이 앞뒤를 더듬어본 순간 자신의 나이 위에는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는다.잘 알다시피, 이처럼 나이에 대해 심리적인 장치를 가동하여 세부 이정표를 세우려 했던 사람이 공자였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논어》에 수록된 〈위정(爲政)〉 편에서 그는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때 목표가 섰고, 마흔에 어리둥절하지 않았고 쉰에 하늘의 뜻을 알았고, 예순에 듣는 대로 훤했고, 일흔이 되어서는 하고픈 대로 해도 엇나가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이을호의 해석에 따름). 이때 서른을 뜻하는 “이립(而立)”이라든지 마흔을 뜻하는 “불혹(不惑)”이라든지 쉰을 뜻하는 “지천명(知天命)”이라든지 예순을 뜻하는 “이순(耳順)”이라든지 일흔을 뜻하는 “종심(從心)”에 대해서는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을 인생의 노정과 관련해 보자면, 공자에게 인생은 먼저 나를 바로 세운 다음 나의 뜻과 인격을 외부로 확장해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그러니 우리는 공자의 관점을 빌려 사람은 완성형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으로 태어나서 사람이라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되기의 과정에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처럼 이 글에서 나이를 구성하는 실존적 좌표를 타진해보게 된 것은 최근 간행된 한 노시인의 시집에서 연유했다. 한평생 서정시의 길을 걸어오면서 삶의 모순된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던 오세영(1942~ ) 시인은 이 시집에서 우리에게 사람이란 인류의 오래된 꿈과 같다고, 우리는 사람-되기를 통해 그 꿈으로 나아가는 존재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
등과 등을 기대는 사람-되기
서로 등에 등을 기댄다는 것은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랴.어려울 때슬며시 내주시는 아버지의 등.슬플 때넌지시 들이미시는 어머니의 등.외로울 때남몰래 빌려주는 친구의 등.그의 체온과 숨결과 맥박이고스란히 나와 하나 되어 모진 추위를 막아주는,이 한 겨울 밤,침대가 아니라, 침낭이 아니라따뜻한 온돌 바닥의 등짝이 내미는 그어부바!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랬듯적막한우주의 숨소리를 듣는다.― 오세영, 〈사람 인(人)〉,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서정시학, 2024제목에서 나타났다시피 시인에게 사람은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는 일이란 중요한 작업에 속한다. 이를 위해 시인은 사람을 뜻하는 한자 “인(人)”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인(人)”이라는 글자가 사람의 형상을 본뜬 상형문자라고 알고 있다. 글자 자체가 팔을 지긋이 내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옆에서 본 모양과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에 대한 한 해석으로서 “인(人)”을 두 사람이 서로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본 모양과 닮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상은 한 사람과 두 사람 즉, 사람의 숫자에 관한 차이를 낳는 것에 그치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 가능성의 세계를 낳는 것과 같은 현격한 차이를 발생시킨다.사실 인간의 신체 기관 중에서 등은 상당히 불리한 부분 중 하나이다. 생존경쟁의 현장에 있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는 사람의 육안을 벗어나 있거니와 다른 이에게 쉽사리 노출되고 마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등을 맡기거나 내주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신뢰나 사랑과 같은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서로 등에 등을 기댄다는 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토대로 하여 말 이상의 “아름다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려울 때” 아버지가 슬며시 등을 내주시거나 우리가 “슬플 때” 어머니가 넌지시 등을 들이미시거나 또 우리가 “외로울 때” 친구가 남몰래 등을 빌려주는 자체로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지 않았던가. 그 순간 내 몸에 오롯이 전해지는 “그의 체온과 숨결과 맥박”은 원치 않는 “모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한 번 살아볼 만하다는 위로의 말과 같지 않았던가.물론 등을 둘러싼 소통은 쌍방향적이어서 내가 상대방에게 전하는 어떠한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내 “체온과 숨결과 맥박”이 상대방에게 고스란히 전해질 때, 내 등은 더 이상 나라는 견고한 성을 방위하기 위한 보루가 아니라 그 이상의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매개가 될 테니까 말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삶과 맞서는 전사라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체온과 숨결과 맥박”은 결코 상대방의 삶을 바꿀 순 없겠으나 상대방에게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선사하기에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 시에서는 우리가 가진 등에 관한 탁월한 능력이 오래된 연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건 “따뜻한 온돌 바닥의 등짝”과 같이 공동체의 지혜가 축적되어온 공간이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등”과 같이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원초적인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등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고 다른 시공간을 내다보게 될 때 어찌 “적막한 / 우주의 숨소리”와 같은 아득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인이 등으로부터 획득한 삶의 지혜를 사람-되기를 위한 자세로 삼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다. 그 하나의 자세는 바로 부정의 긍정, 즉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인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을 사모하다가 지쳐 시드는” “5월의 장미 꽃잎”과 같이 “모든 결핍”을 채워지지 못한 상태로 보기보다 채우기 위한 “갈망”으로 보는 것을 들 수 있다(〈꽃잎〉). 다른 하나의 자세로 우리는 부정과 긍정의 대립, 즉 기존의 이분법적인 인식을 통합하는 것이다. 예컨대, “언제나 한 쪽만의 소유, 일방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인간이 만든 소리”보다 “항상 양자 스스로 녹아 만들어”지는 “자연의 소리”를 지향하는 것을 들 수 있다(〈바람 소리〉).동그라미를 품는 사람-되기호수는 그 무엇이나 너그럽게품어 안는다.풍덩, ―차분하게 가라앉는 돌텀벙, ―조급히 뛰어드는 돌출렁, ―미끄러져 소용돌이치는 돌호수는 그 무엇이나 흉 허물없이받아들인다.철벅, ―팔매질로 날아오는 돌쫑쫑, ―물수재비로 떠서 오는 돌찰싹, ―발길질에 튀어 자빠지는 돌조약돌, 자갈돌, 수정돌, 차돌, 곱돌, 꽃돌, 몽돌……호수는 그 무엇이나 따뜻하게감싸 안는다.모난 돌에도파문만은 언제나 동그랗게 그리는 호수.호수는 항상 푸른 하늘을 바라고 산다.― 오세영, 〈호수〉,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서정시학, 2024이 시에 나타난 “호수”는 한국의 현대 시인들이 즐겨 다룬 시적 대상 중 하나이다. 그 하나의 사례로 우리는 사물과 자연을 선명한 이미지로 포착하는 재주를 가졌던 정지용(1902~1950) 시인의 〈호수 1〉(1930)을 들 만하다. 이 시에서 그는 “손바닥 둘로 폭” 가릴 수 있는 “얼굴 하나”와 “호수만” 한 “보고 싶은 마음”을 대비하고 있다. 어쩌면 그에게 전자는 숨길 수 있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대상인 데 반해, 후자는 도저히 숨길 수 있거니와 자기 통제를 벗어난 대상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눈 감을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마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어찌할 수 없는 자기 마음을 수긍하겠다는 자세를 의미하지 않는가. 이 순간 그의 가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황홀함이 그윽하게 차오르는 게 우리 눈에 비친다. 이런 점에서 정지용의 호수가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감정을 실어 나르는 이미지에 가깝다면, 위에서 오세영의 호수는 자신이 바라는 사람의 궁극적인 형상을 실현하고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이 시에서 호수는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로서, 동그라미, 즉 원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언뜻 보면, 동그라미는 모난 것과 대비되어 그 차별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형태의 측면에서 동그라미는 부드럽고 수렴적이며 포용적인 속성을 지닌다면, 모난 것은 날카롭고 발산적이며 공격적인 속성을 띠는 것으로 보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에 따른다면 우리에게는 후자보다 전자에게서 좀 더 온전한 삶의 가치를 발견할 법하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정작 우리의 사고체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거니와 이분법적 시각으로 운용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그러니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전자와 후자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세상의 본래 모습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조금은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방성과 유연함에 따라 수많은 관계를 형성해가는 가운데 진정 자기의 모습을 찾고 지켜나가는 자세가 요청되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러한 점은 시에서 호수와 돌들의 관계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에서 하나의 호수는 “조약돌”, “자갈돌”, “수정돌”, “차돌”, “곱돌”, “꽃돌”, “몽돌” 등 각종 돌과의 접촉과 만남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어떤 때에는 “차분하게 가라앉는 돌”로 인해 “풍덩”거리는 소리를 내고, 어떤 때에는 “조급히 뛰어드는 돌”로 인해 “텀벙”거리는 소리를 내며, 또 어떤 때에는 “미끄러져 소용돌이치는 돌”로 인해 “출렁”거리는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팔매질로 날아오는 돌”로 인해 “철벅”거리는 소리가 나고, 어떤 때에는 “물수재비로 떠서 오는 돌”로 인해 “쫑쫑”하는 소리를 내고, 또 어떤 때에는 “발길질에 튀어 자빠지는 돌”로 인해 “찰싹”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이외에도 호수는 돌들과의 관계를 통해 다채로운 모습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잠재성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호수와 돌들과의 관계에서 파생한 각각의 의성어와 의태어가 호수의 모습이기도 하고 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저 의성어와 의태어들은 하나이면서 둘인, 그리고 둘이면서도 하나인 모순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호수는 항상 푸른 하늘을 바라고 산다.”라는 구절을 음미해봐야 한다. 어쩌면 호수가 저렇게 다양한 존재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결같으면서도 변화무상한 하늘을 닮으려고 한 것에서 연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호수 위에 하늘이 내려앉아 있으면서도 호수는 결국 자기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모습이 아른거린다.아름다운 통증을 열렬히 사랑하기그러니 사람은 결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인 존재여서 우리는 늘 사람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진 사람-되기라는 과제는 늘 생활의 필수목록을 초과하고 있으나, 우리가 그 과정에서 이 세상을 다른 눈으로 응시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이랴. 시인의 따끔한 말마따나 봉오리를 터트린 표면적인 아름다움에 현혹되기보다 그 꽃이 그 절정을 맞이하기까지 감내한 “가장 어둡고 아픈 고통”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그걸 응시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아름다운 통증을 축복과 같이 느끼게 될 것이다.활짝 펴 아름답다고 감탄하지 마라.꽃은가장 어둡고 아픈 고통의 그 절정에서 봉오릴터트리는 것이니.― 오세영, 〈이 아침〉, 《등불 앞에서 내 마음 아득하여라》, 서정시학, 2024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