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절대적인 자유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2월 4일부터 5월 30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관에서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뜻깊은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벽면에 소개되었던 것처럼, 이 전시회는 일제 강점기에 관한 우리의 통념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우리에게 일제 강점기는 흔히 ‘암흑’과 ‘절망’의 시대로 인식되어왔으나, 그 안에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이 꿈틀거렸던 ‘변혁’과 ‘역동’의 시대로서 말이다. 이를 위해 이 전시회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 수도 경성이라는 시공간을 수놓았던 다채로운 예술을 펼쳐놓음에 따라 관람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특별한 감각을 선사하고 있었다.먼저, 관람객들은 일제 강점기에 이른바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할 만한 다재다능한 예술가들이 출현하여 활약했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실제로 동시대 서구에서 유행하던 첨단의 지식과 문물을 호흡하면서 이를 예술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1930년대 이상의 경우 자기의 작품에 수학, 물리학과 같은 비(非) 시적인 요소를 적극 도입하려 한 실험을 감행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건축가, 화가, 출판 편집자로서 활동한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국가를 잃은 예술가들이 예술에서만큼은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을 발휘하고자 했었다고, 그로 인해 숨 막히는 식민지 현실을 가까스로 견뎌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다음으로, 관람객들은 일제 강점기 예술가 사이에 신뢰 깊은 우정을 구축해갔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사례로 화가 구본웅과 정현웅이 각기 절친 이상과 백석의 초상을 그렸다거나 그들이 관여한 잡지의 표지를 장식해준 사실, 그리고 이상이 자기 작품의 삽화를 그린 것을 넘어 친구 박태원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 넣은 사실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다른 예술가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으나, 사실 각별한 누군가에게 자기 재능을 제공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술이라는 공통적인 꿈을 지향함에 따라 비인간성이 난무하는 식민지 현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로 인해 이곳과는 다른 따뜻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내다봤을지 모른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때 필자는 다른 무엇보다도 전시실의 어두컴컴한 벽면에 비친 한 영상에 눈길이 갔다. 바로 이 영상은 프랑스 영화감독 르네 클레르(René Clair, 1898~1981)와 함께 1930년대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사랑한 장 콕토(Jean Cocteau, 1889~1963)의 50분 남짓한 영화 《시인의 피》(1930)의 한 장면이었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현, 감독한 것이라 알려진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의 원리에 의문을 던지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이 세계에 없다고 치부되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 예술가들은 반쪽짜리로 위축된 인간 모습으로부터 공포감을 느끼면서 온전한 인간 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의욕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순간 필자는 불현듯 몇 년 전에 개봉한 SF영화 《컨택트》(2017)를 이상이 봤다면 어떠한 생각을 했을지 상상해보게 되었다. 이 영화 또한 이 세계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과 감각을 낯설게 만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세계를 향한 인간학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상이 현 명동예술극장에 있던 영화관 ‘명치좌’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가정 아래 영화의 서사와 그의 시를 겹쳐보기 위한 작은 시도와 같다.세계관과 시스템에 포획된 사람드니 빌뇌브가 감독한 영화 《컨택트》는 2016년 미국에서 개봉한 이래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각종 부문에 지명되었을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왔다. 이 영화는 애초 SF 소설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2002)에 수록된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하였으나, 영상, 음악 등을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연출력을 통해 소설과는 다른 과학적 상상력을 자아내고 있다. 영화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지구 12곳에 외계 비행물체가 출현함에 따라 미국 캠프 소속의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와 물리학자 이안 도넬리는 외계인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운 루이스가 전쟁의 위기에 봉착한 지구를 구해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는 무엇보다 서사의 극적 전개를 주도하는 매개체로서 언어의 문제가 관여하고 있는 셈이다.이때 아마도 이상은 언어가 세계관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 그에 따라 우리가 특정한 시간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 같다. 실제로 영화에서 루이스는 헵타포드에게 인간의 언어(영어)를 가르쳐주고 그녀 역시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독해가면서 두 언어에 담긴 세계관과 시간관의 차이를 알아차리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영화에서 인간의 언어는 말소리를 기호로 나타낸 문자, 즉 표음문자로서 인과관계, 시제 등을 통해 세계를 파악하려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헵타포드의 언어는 글자를 통해 뜻을 전달하는 문자, 즉 표의문자로서 원의 형태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를 통합적으로 파악하려는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전자의 언어를 쓰는 인간은 과거-현재-미래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선형적 시간관에 사로잡혀 있다면, 후자의 언어를 쓰는 헵타포드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비선형적 시간관에 입각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상은 아마도 헵타포드의 언어에 대해 신선함을 느끼는 것을 넘어 그와 대척점에 놓인 인간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들여다봤을 법하다. 물론 그가 들여본 심연은, 헵타포드의 단어 하나가 가공할 만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례에서 드러나듯, 언어 자체가 지닌 의미 불완전성이라든지 완전한 소통 불가능성에서 비롯했을 수도 있다. 그보다 이상은 언어와 인간의 자리바꿈, 즉 인간의 발명품인 언어가 오히려 인간을 비롯한 세계를 재단하는 기준이나 척도로 탈바꿈하는 현실 상황에 대해 탄식하지 않았을까. 사실 우리가 어떠한 대상의 본질을 간파했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대상이 지닌 또 다른 가능성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는 차단되어 버리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반복하게 됨에 따라 우리는 자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덫에 빠져버리니까 말이다. 아래 시에서 그러한 인식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겠다.
사과 한 알이 떨어졌다. 지구는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 최후.이미 여하한 정신도 발아하지 아니한다.― 이상, 〈최후〉, 권영민 편, 《이상 전집 1 시》, 뿔, 2009 (가독성을 위해 띄어쓰기를 하였음)이 시에서 이상은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인해 지구 전체가 황폐화한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명하고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뉴턴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서 질량을 가진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 즉 만유인력을 발견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모든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긴다.’라는 법칙으로 정식화하였다. 이를 계기로 인간은 자연 현상을 인과관계에 따라 파악하거나 세계를 분석적, 실증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인류의 사고방식 자체를 획기적으로 뒤바꾼 혁명,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부를 만할지도 모른다.하지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오히려 서구 첨단의 지식과 문물에 밝았던 이상에게 우려스러운 대상으로 비쳤다. 바로 그로 인해 “지구는 부서질 정도로 아팠다”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만유인력의 법칙은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무소불위의 척도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 그것은 인간을 신이나 자연의 종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리어 인간의 관점과 삶을 구속하는 장치가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어느새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에 절대성을 부여하거나 ‘숫자적인 것’으로 모든 가치를 매기는 산술의 논리에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그가 보기에 이러한 세계관과 시스템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인간다운 가치라든지 창조적인 힘을 생산해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의 다른 시에 나타나듯, 그러한 인간은 자기가 만든 감옥에 갇혀 바깥세상을 꿈꾸는 죄수와 무엇이 다른가(〈수인이 만든 소정원〉).사람이 사는 새로운 문명의 꿈영화 《컨택트》에서 인간 언어의 불완전성은 결국 소통의 불완전성을 낳고 세계 전체의 위기를 낳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무기를 주다”로 해석된 헵타포드의 문자이다. 애초 헵타포드에게 기초적인 단어 하나하나를 알려주면서 소통해가던 루이스는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물은 결과 이 대답을 얻게 되었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기’라는 단어는 인간에게 싸움, 전쟁과 같은 위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만 것이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이 단어의 등장으로 인해 비행물체가 분산되어있던 12곳의 캠프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어가거니와 심지어 미국 캠프에서는 잘못된 언론에 휘둘린 한 군인이 비행물체 내부에 폭탄을 설치하여 한 헵타포드를 죽음에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순간 이상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또 믿고 마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 이외의 다른 해석이 시도될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차단된 상황을 목도하지 않았을까.이러한 상황에서 루이스는 섣부른 판단을 접어두고 끈질기게 헵타포드와의 소통을 시도한 결과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게 된다. 바로 그들이 3000년 뒤의 아득한 미래에 인류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서 미리 인류의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는 것을 말이다. 이를 위해 헵타포드는 인류에게 미래의 시간을 볼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를 ‘무기’로 주려고 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형적인 시간관에 입각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에게 비선형적인 시간관에 입각한 언어를 선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기존의 눈과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 지점에서 ‘무기’는 전혀 다른 의미의 ‘선물’로 탈바꿈하고 있다. 아마도 이 순간 이상은 우리의 눈앞에 있는 세계와 그것을 설명하는 담론들이 결코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기존과는 다른 세계와 담론들이 얼마든지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소 길지만 그의 초기 야심작 중 하나인 아래 시를 읽어보자.사람은 빛보다 빠르게 달아나면 사람은 빛을 보는가, 사람은 빛을 본다, 연령의 진공에 있어서 두 번 결혼한다, 세 번 결혼하는가, 사람은 빛보다도 빠르게 달아나라.미래로 달아나서 과거를 본다, 과거로 달아나서 미래를 보는가, 미래로 달아나는 것은 과거로 달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고 미래로 달아나는 것이 과거로 달아나는 것이다. 확대하는 우주를 우려하는 자여, 과거에 살으라, 빛보다도 빠르게 미래로 달아나라.사람은 다시 한 번 나를 맞이한다, 사람은 보다 젊은 나를 적어도 만나기는 한다, 사람은 세 번 나를 맞이한다, 사람은 젊은 나를 적어도 만나기는 한다, 사람은 편하게 기다리라, 그리고 파우스트를 즐기거라, 메픠스트는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이다.속도를 조절하는 날 사람은 나를 모은다, 무수한 나는 말하지 아니한다, 무수한 과거를 경청하는 현재를 과거로 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과거, 무수한 과거를 경청하는 무수한 과거, 현재는 오직 과거만을 인쇄하고 과거는 현재와 일치하는 것은 그것들의 복수의 경우에 있어서도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연상은 처녀로 하라, 과거를 현재로 알라, 사람은 옛것을 새것으로 아는도다, 건망이여, 영원한 망각은 망각을 모두 구한다.내도(來到)할 나는 그 때문에 무의식중에 사람에 일치하고 사람보다도 빠르게 나는 달아난다, 새로운 미래는 새로웁게 있다, 사람은 빠르게 달아난다, 사람은 빛을 드디어 선행하고 미래에서 과거를 기다린다, 우선 사람은 하나의 나를 맞이하라, 전등형(全等形)에 있어서 나를 죽이라.사람은 전등형의 체조의 기술을 습득하라, 그렇지 않다면 사람은 과거의 나의 파편을 여하히 할 것인가.사고의 파편을 반추하라,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불완전하다, 연상을 죽이라, 하나를 아는 것은 셋을 아는 것을 하나로 아는 것의 다음으로 하는 것을 그만두어라, 하나를 아는 것의 다음은 하나를 아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라.사람은 한꺼번에 한 번을 달아나라, 최대한 달아나라, 사람은 두 번 분만되기 전에 ××되기 전에 조상의 조상의 조상의 성운의 성운의 성운의 태초를 미래에서 보는 두려움으로 하여 사람은 빠르게 달아나는 것을 유보한다, 사람은 달아난다, 빠르게 달아나서 영원에 살고 과거를 애무하고 과거로부터 다시 그 과거에 산다, 동심이여, 동심이여, 충족될 수 없는 영원의 동심이여.― 이상, 〈삼차각설계도―선에 관한 각서(5)〉, 권영민 편, 《이상 전집 1 시》, 뿔, 2009 (가독성을 위해 띄어쓰기를 하였음)이 시에서 이상은 단순히 “빛”에 관한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빛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물체로서 누구에게나 동일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시간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상은 사람이 “빛보다 빠르게 달아”나면서 그 빛을 본다고 가정함에 따라 그러한 절대적인 시간에서 벗어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그의 가정대로 만약 사람이 “빛보다 빠르게 달아난다면” 시간이 멈추는 진공 상태가 발생하게 되고, 이때 사람은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가 되는 현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빛보다 빠르게 달아나면서 그 빛을 보는 사람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 번 결혼을 할 수 있게 되고 젊은 내가 늙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물론 이러한 이상의 시적 상상은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가 활동하던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이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양자역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E. Schrödinger)가 고안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우리가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가. 그가 고양이 한 마리를 청산가리가 든 유리병, 방사성물질 라듐, 방사능을 검출하는 계수기, 망치와 함께 상자에 가둔 사고 실험에서 드러나듯, 우리가 시간이 지난 뒤 상자를 열어보지 않는 한 결코 고양이의 생사를 단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어떠한 시스템에는 이미 현실화하지 않은 여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닌가.흥미롭게도 이상에게 사람이 시간을 통합적으로 보는 일은 진정한 자아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과 통하고 있었다. 앞서 그의 상상대로 사람이 빛보다 빠르게 달아나면서 그 빛을 보게 된다면, 수많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탄생은 앞으로도 눈부시게 이어질 테지만, 그에게 숱한 내가 다채로운 빛깔을 띨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아의 중심에 관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전등형(全等形)”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볼 때 그 수많은 내가 지금의 나로 수렴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함께 그가 나를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로 서게 만드는 근원, 즉 “태초”의 시간까지 탐색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뜻깊은가. 그가 살아간 식민지 현실이 살아있는 존재를 모조리 짓밟아 삭막한 평면의 거울에 가두어버렸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말이다.다시 시작하는 내 인생의 이야기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이상의 눈앞에 펼쳐진 영화의 후반부로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이상은 루이스가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 중에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된 지구를 구해낸 행동보다도 그녀에게 다가올 미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행동에 대해 공감을 표했을지 모르겠다. 서사의 긴장감을 높이려고 도입한 전자의 경우 중국과 그 이외의 세력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는 집단으로 형상화함에 따라 그들에게 악의 프레임을 씌운 것처럼 비쳤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보다 이상은, 루이스가 미래의 시간에 자기의 딸 한나가 불치의 병으로 죽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한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건 단순히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의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분명 루이스에게 딸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테지만 그전까지 순간순간 딸과 함께 만들어갈 찬란한 인생의 이야기를 그녀는 결코 거부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루이스의 선택은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낼 심리적인 시간이 결국 차갑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긴 결과라고 이상은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는 루이스가 이안에게 건넨 다음 고백에 전율하면서 그 무엇보다 사랑이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당신 품이 이렇게 따뜻한 걸 잊고 있었어.”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