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지금 우리는 장차 한국 사회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다. 우리는 느닷없이 멈춰 있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어느 때보다 바쁘기만 하다. 그것은 우리가 맞이하는 이 시간 자체가 뒤돌아봄을 전제로 하는 성찰의 시간인 것에서 연유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부여한 권력이 어떠한 목적과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시민으로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냉철하게 되물을지 모르겠다. 또한 우리에게 이 시간 자체는 내다봄을 전제로 하는 개조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전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이 사회를 좀 더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청사진을 제출할 것인지 진지하게 숙고하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기존의 낡은 현실과 과감하게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할 혁명의 시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때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 Freud, 1856~1939)는 혁명의 과업을 수행해야 할 우리에게 중요한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인간 존재의 마음과 내면의 영역을 물에 떠 있는 빙하에 빗댄 바 있다. 바로 그의 비유에서 수면 위에 드러나는 30% 남짓한 빙하는 우리가 의식이라 여기던 영역이고, 수면 아래 잠겨있는 70% 남짓한 빙하는 우리가 여태까지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무의식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가 배당한 수치에서 나타나듯, 사실 우리가 그동안 중요시하던 의식보다도 무의식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고 있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 존재의 진정한 모습은 수면 아래 잠겨있는 빙하와 같이 우리가 결코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심층적인 영역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가 ‘인간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와 통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미완성에 그친 극적인 변화와 같은 것을 혁명이라고 믿어왔을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가 지금까지 제도, 이념, 체제와 같은 현상적인 것만을 바꾸는 혁명에 그쳤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때 우리의 눈앞에는 기존의 현실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분위기가 펼쳐지는 것 같았으나, 사실 그것을 지탱하고 있던 뿌리와 근본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였을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그저 동일성의 틀에 얽매여 있기에 원리상 기존의 폐해를 답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혁명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나면 어김없이 권력은 기득권 유지와 시스템 존속의 수단으로 변질하고 말지 않았던가. 그보다 우리에게는 자아의 닫힌 문을 열고 미지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인간혁명이 절실히 요청된다. 우리는 그 문으로 나가서 수많은 타자와 만나고 마음과 마음이 뒤섞이는 뜨겁고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혁명은 관습적인 의미에서 정치가 아니라 우정과 사랑을 실현해가는 축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혁명은 순전히 혼란한 사회 질서를 회복하거나 재정비하려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시도에 가깝기에 일회적인 역사라기보다는 영구적인 사건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는 이러한 혁명의 과업을 오랫동안 시적 과제로 삼아온 사례로 “변방”의 시인 백무산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열 번째 시집에서 “억압된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 “세상의 찌꺼기”를 재료로 “무슨 연금술이라도 부려야만 헸”다고 고백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전환점에 맞이하고 있는 우리가 그의 시집을 통해 혁명의 본질과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인간성을 덜어내기매번 다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몸가짐이 거침없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똥 푸러 오는 사람들 속이 훤히 다 보일 것 같다종일 남의 집 똥구덩이에 고개를 박고얼굴에 입술에 똥물 바르고 그 돈 벌어 밥 먹고애들 학교 보내고 마누라 화장품도 사주고 조상 제사도 모시고아무나 하는 일 아니다 속이 컴컴한 자들근기 모자라는 자들은 근처에도 못 가는 일이다꽃을 노래하고 별을 우러르고영롱한 이슬을 글에 담는 사람들더러영혼이 맑은 사람인 것 같아요 누군가 감동하자그 영혼들이 우쭐대지만 속사정은 개뿔이다속에 구정물이 가득해서 이슬을 찾고당장 숨이 차고 혼미해서 꽃을 찾고인간성이 시궁창이라서 향기를 찾고영혼이 누더기라서 별로 기워야 했을 것아니면 오염되기 쉬운 선천적 기형이라서별과 이슬을 복용해야 하거나인간이 제 손으로 똥 푸는 일이 없어지고자기가 싸놓고 제 것이 아닌 양혐오하고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고상한 습성을동물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습성을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백무산, 〈인간 형성〉,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백무산 시인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보편적인 지위를 가진 개념에 대해 상대성과 특수성을 대치시킴에 따라 그 개념에 드리워진 공허한 바닥을 들춰내고 있다. 그 예로 우리는 이 시에 나타나는 “인간성”을 통상적으로 짐승과 같은 야만성과 대비되는 인간 고유의 속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백무산 시인에게 이 개념은 인간의 지식과 관념이 축적되어온 사회·역사적인 산물에 불과하거니와 오히려 인간의 저속함과 추악함을 가리기 위한 허위적인 장치와 같았다. 이 개념의 위상을 전도시키기 위해 그는 똥 푸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과 자연을 글에 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비틀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평소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의 노동에 대해 떳떳하기에 남들에게 자연스러운 태도를 내보인다. 그에 반해 우리가 평소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도리어 자기의 검은 속을 감춰야 하기에 남들에게 가식적인 태도를 내보인다고 할 수 있다.물론 시인이 말하는 이러한 인간성은 오랜 역사적인 연원을 가지고 있거니와 인류 문명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절대 요소이다. 이를테면, 백무산 시인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문자가 다른 이에게서 “외상”을 받아내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현하였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이 “곡물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게 문자는 후대로 지식을 전하기 위한 매개가 아니라 경제적 예속 관계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외상 장부〉). 이러한 계급 관계에서 보자면 우리가 평소 자주 언급하는 “무소유”조차 정작 “없는 사람”들은 결코 실천할 수 없는, 넉넉하게 가진 자들만 실현할 수 있는 생활 지침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무무소유〉). 그리고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버러지”와 같은 비인간적 존재로 바깥으로 배제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버러지 만들기〉).이런 점에서 백무산 시인에게 거추장스러운 인간성을 어떻게 덜어낼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이에 관한 하나의 방안으로 그는 거울상과 같은 자아의 허상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 하나의 계기로 그는 투명한 유리창에 부딪혀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새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애초 그 새는 “붉은 노을 속”으로 뛰어들었으나, 기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진짜 자기로 착각함에 따라 그것과 충돌하고 만 것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안쪽의 나”를 사회적인 관념에 따라 만들어진 가짜 자아라는 것을 깨닫고 그 바깥이야말로 자신이 마주해야 할 진짜 현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차가운 신발〉). 마찬가지로 그는 혼자 산에 있는 숲을 통과하면서 바깥의 “그늘”과 마주한 체험을 통해 “어디까지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순간에 봉착한다((〈내가 어디까지인지〉). 따라서 자아 자체는 가변성과 임의성을 가지고 형성되어온 온 사회적인 산물이기에 우리는 그 허상에서 벗어나 진짜 자아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다른 하나의 방안으로 그는 일상의 자아를 정지시키는 타자의 느닷없는 침입을 수긍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는 시내버스가 급정거함에 따라 옆에 서 있던 “살찐 사람의 무게”가 고스란히 앉은 자신에게 전해진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평소 그에게 자신의 무게는 감당해야 할 삶의 짐으로서 언제나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으나, 타인의 무게가 전해진 순간 그것은 다른 사람과 나눠가질 수 있는 삶의 영역으로 변모하게 된다(〈무게〉). 이러한 그의 체험은 이어서 우연히 자기 집의 한구석에 떠돌이 개의 가족을 거두어 키운 경험담으로 확장되고 있다. 물론 이들로 인해 사람 사는 공간은 “황무지”, “우범지대”, “격투기장”과 같은 야생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말았으나. 그는 오히려 이를 통해 “내게서/ 인간을 한 움큼 덜어”내는, 낯선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그들 등쌀에〉). 이처럼 백무산 시인은 인간을 비롯하여 비인간에 이르기까지 타자의 영역을 수용함에 따라 나와 너가 뒤섞이는 혼종적인 존재로 거듭나고자 했다.무위에서 무존재로 나아가는 정지의 순간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백무산, 〈정지의 힘〉,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2020이 시에서 백무산 시인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정지”의 순간을 예찬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정지를 게으름이나 도태로 환기하는 무능력의 지표로, 그리고 활동이나 생산을 그것과 상반되는 능력의 지표로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전자, 즉 정지와 멈춤을 거부하거나 기피하고 후자, 즉 “달린다”, “간다”, “한다”로 표상되는 행위와 “된다”로 표상되는 존재와 “안다”로 표상되는 성찰을 삶의 맹목적인 목표와 지향점으로 삼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이 행마다 공통적으로 쉼표를 삽입하고 있는 점은 후자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세태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전자가 후자에 대해 제동장치가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왜 그러한가. 그건 바로 “꽃”이 “씨앗”, 즉 “멈춤의 힘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정지는 행위, 존재, 성찰과 같은 인간의 모든 역량을 낳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이러한 정지에 관한 사유는 최근 철학계에서 뜨거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무위에 관한 사유와 통하고 있다. 일례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G. Agamben, 1942~ )은 유대교 안식일로부터 무위의 축제적 성격을 살펴본 바 있다. 이 시기 동안 우리의 행위는 일상에서 그 행위를 규정하던 이유와 목적들, 그리고 그것의 경제를 유예하고, 무화시키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에게 무위는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과 활동과는 구별되는 “행위와 삶의 특정한 양태”라고 할 만하다(조르조 아감벤, 김영훈 옮김, 《벌거벗음》, 인간사랑, 2014).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무위를 통해 더 많은 성과를 쌓기 위해 속도와 경쟁 속으로 자신을 몰아세우는 행위에서 벗어나 활동 그 자체의 순수한 가치와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시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와 같은 행위의 원천을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같은 무위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시인이 무위로부터 무존재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는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에 이어서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했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라며 존재의 형성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행위의 본질을 구원하는 무위에 대해 말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행위는 결국 존재로부터 파생하기에 무위에 선행하는 무존재에 관해 말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롭게도 백무산 시인은 과잉된 삶에 틈입하는 죽음의 시간을 맞이함으로써 무존재로서 정지를 실천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다락에서 발견한 “옷 한 벌”이 “그 시절의 나를” 떠나보낸 “수의”라고 생각하면서 매 순간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맞이하려는 심정을 내비치고 있다(〈수의〉). 심지어 그는 깁스를 한 자기를 주변 사람들이 “환대”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계기로 “재앙”을 긍정하고 있다(〈재앙의 환대〉). 그러니 우리가 무존재로 돌아감에 따라 존재의 유한성이 우리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한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얼마나 찬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독자 여러분께 띄우는 편지‘언저리의 인문과 예술’이라는 특집으로 시작한 이 글은 지난 2023년 4월 19일에 첫발을 내디뎠으니 그사이 2년의 세월을 넘긴 셈입니다. 애초 필자는 스스로 두 가지 약속을 하면서 글을 시작했습니다. 그 하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2주에 글 한 편을 꼭 연재하자는 것이었는데,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다른 하나는 글을 쓸 때 나의 목소리를 내세우기보다 시의 심층에 깔린 사람의 무의식을 건져 올려 그 사람의 목소리로 재현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시라는 익명의 장소를 통해 서로 만나고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위의 두 가지 약속을 지키는 일은 매번 쉽지 않은 일이었고 때론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독자 여러분의 응원과 격려 덕분이었습니다. 언젠가 지난 저의 글을 모아서 다른 형태로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고대합니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