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3년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역사교사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이다. 근대적 공화국을 지향했던 3.1운동을 기점으로 분출된 다양한 계층의 욕구들과 다원적인 사상의 전개가 해방이라는 새롭게 열린 공간 속에서 공통의 경험으로 응집해가는 역사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교사는 매우 어려운 지적 축적을 해야만 한다.이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의 충돌, 상이한 관점들이 축적해온 이념의 계보들, 그리고 이들과 연루된 현재의 정치적 정념들과 그에 기반해 생장하는 미래의 세력, 그리고 이와는 무관하게 혹은 더 정확히는 조금은 비켜가며 생활했었던 무명대중의 실제 체험과 그 체험을 표현하는 목소리, 모든 고려 속에서 역사교사는 이 시대를 다루어야만 한다. (물론 대부분의 역사교사는 편의한 이념의 계보 위에서 망설이며 서 있을 뿐이지만)그러나 한동안 해방과 건국, 분단과 전쟁, 그리고 오랜 기간의 이념적 긴장, 그 기반 위에 축적된 관념의 이너시아들, 우리는 흔히 이러한 거시적 맥락과 구도 속에서 또한 (명확한 자기 정체의 노출을 고지케 하는) 그 기표위에서 다루기를 권유받아왔다. 어느 계보에 서는가가 역사교사로서의 중요한 자기 정체성이 되곤 했다. 그러는 동안 해방 후 3년의 역사는 관점에 의해 포획된 퍼즐이 되곤 했고, 때로는 그 일부가 상호암약에 의해 은폐되기도 했다. 바로 그 포획과 은폐가 지금 첨예하게 발생하고 있는 현대사 역사 갈등의 씨앗이지 않을까?(역사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그러한 점에서 글에서 소개할 이쾌대의 그림은 이러한 관성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혹은 포획되거나 은폐되어 사라진 것들에 대한 갈증을 약간은 해소할 수 있게 하는, 혹은 더 나아간다면 시대 이해의 난맥상을 복원하고, 갈등의 폭을 좁힐 수 있는 수업 소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이쾌대는 경북 칠곡 출신의 화가이며, 해방 전후를 직접 체험한 인물이다. 그는 이 시대를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표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다양한 주체들이 경험했던 해방공간, 그리고 그들이 체험하고 표현했던 시대에 대한 단상을 이념적 계보들에 포획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즘의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이는 마치 프랑스 혁명과 이후 제 혁명 과정을 목격하고, 그 체험에 대한 다양한 주체들의 목소리를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묘사했던 들라크루아나 쿠르베를 보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다. 사실 그림을 보면 이쾌대의 기법은 이들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받고 있다.프랑스 혁명과 제 혁명의 영향 하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전개되며, 절대주의의 전통과 부딪히고 수용되거나 외면받기도 하는 그 복잡 다다한 현상들을 쿠르베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통해서, 얼마나 간명하면서도 다양한 목소리로 이해 할 수 있었는지 상기하면 이쾌대가 남긴 그림의 가치는 가늠이 될 것이다.오늘 소개할 이 그림은 ‘해방고지’라는 그림이다. 성화인 수태고지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기도 한데,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아기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것처럼, 해방의 순간을 고지하는 그림이다. 그림 속 군상들에겐 다양한 감정과 욕망들이 들끓고 있다. 흰옷을 입고 달려오는 여성들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해방이라는 기쁨과 환희,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열정과 에너지, 그러나 그사이, 혹은 위 아래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민중들이 겪어야만 했던 절망, 그리고 해방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조선’이라는 낡은 체제의 모순들로 인해 ‘죽음’처럼 흐르는 고착된 ‘어둠’의 심성들이 뒤섞여 있다.곧 찾아올 분단의 현실에 대한 불안들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그림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다. 성화인 수태고지처럼 ‘해방’이라는 성령과 같은 기쁨으로 모든 것이 정화되는 것도, 이념의 계보로 정돈되는 것도 아닌 복합적이며, 불온한 것들로 들끓는 혼돈의 시대, 이쾌대는 다양한 군상들을 통해 이 시대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곧 3월이 온다. 3.1 운동은 ‘조선’이라는 낡은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는 한반도 역사의 새로운 태동으로 공통의 합의를 얻고 있지만, 여전히 해방 3년을 둘러싼 이념의 계보들이 충돌하는 불온한 역사전쟁의 불씨이기도 하다.해방 3년의 역사(역사교사로서), 가지런히 정돈된 이념의 계보 위에 서서, 성령과 같은 환희로 ‘해방’의 기쁨만을 고지할 것인지, 혹은 그 아래 흐르는 해소되지 못한 어둠과 절망의 시간들로 ‘부정의’의 시간으로 고지할 것인지, 이처럼 회복되지 않은 간극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대를 있는 그대로 다양한 시각에서 목격하고 상세히 기록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섬세하게 귀기울이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점에서 이쾌대의 그림은 중요한 수업의 소재이며, 역사 공부를 통해 공동체를 회복해가는 과정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