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미술가로 알려진 박이소의 삼위일체라는 제목의 드로잉입니다. 개념미술이란 용어는 다소 생소한데요. 개념미술은 종래의 예술 지향적 형태에서 벗어나 반미술적 제작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라고 합니다. 작품 그 자체보다도 제작의 의사나 과정이야말로 예술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개념미술의 핵심이라고 합니다.박이소 작품은 긍정, 만남과 소통, 새로운 이상향에 대한 성찰을 담은 개념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그림도 그 기나긴 여정의 정거장이죠.삼위일체는 간장과 콜라 커피를 재료로 만든 어떤 음식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세 가지 재료는 서로에게 있어 상당히 낯선 대상들입니다.낯선 것들의 만남과 소통이 삼위일체라는 기묘한 개념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어울릴 수 없는 [낯섬]들이 하나의 용기 속에서 어떤 향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박이소에게 그 [낯섦]의 조우는 긍정의 힘을 생성하는 출발점처럼 보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잇는 만남. [낯섦]을 해소하는 어울림, 이후에 발생할 창조적 파괴와 탄생의 긍정성, 박이소는 바로 이 그림을 통해 그의 사유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전환이 박이소의 개념적 여정으로 나타나는 듯하기도 합니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가치전환을 위한 전령이며,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전통의 가치를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창조의 과정이기도 하죠. 파괴는 생성의 기쁨을 포함하는 환희의 과정이라 했던 니체 사유의 여정이 박이소의 삼위일체 속에 담겨있는 듯해 보이기도 합니다.그러나 과연 그 탄생은 아름답기만 할까요. 태양을 향하는 삼나무처럼 얼키설키 올라가는 연기는 어떨까요? 그 향기가 니체가 말한 위대한 창조의 생기일까요? 저는 문득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저의 기분 탓이었습니다.낯섦,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지켜주는 낯섦의 파괴. 그 만남이 긍정적이기만 할까요? 자기 정체성을 파괴하고 만남이라는 공의에 준비 없이 쓸려가는 것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낯섦의 파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통이 과연 진정한 삶의 명제일까요? 소통을 위해서 불투명한 어떤 해명을 해야만 하는 상황. 자기의 상태를 표상해야만 하는 상황. 혹여 고통스럽진 않을까요.문득 들뢰즈의 말이 떠오릅니다.“현대인이 진정으로 고통을 겪는 것은 말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해야만 하는 상황이 개인들을 구속하기 때문이다.”소통의 공의가 개인을 구속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또한 타인과의 만남 또한 거친 고통을 수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숨 막히는 사람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달라서 일 때가 많습니다.그 누구의 잘못도 없이 서로에게 숨 막히는 상황이 연출 될 때가 있죠.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그때의 숨 막히는 사람의 무게는 지옥의 무게와도 같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만남의 또 다른 공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만남과 소통.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생성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냥 저기 솟아나는 향기가 역할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역습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개념 해석의 여정 또한 예술의 일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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