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전의 4월은 마치 캄캄한 터널로 향하는 입구와 같다. 그 터널로 들어서자마자 한 줄기 빛이 쏟아지는 출구로 가닿기까지는 별수가 없다. 그저 눈앞의 어둠을 응시한 채 오직 내 몸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엄연히 말해 그 소리는 불명확한 신음에 가까워서 그제야 우리는 알게 된다. 내가 어딘가 앓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정말로 우리 주변에선 갖가지 증상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부쩍 눈에 띈다. 그래서 우린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통행권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미국 태생의 시인 T.S.엘리엇의 대표작 《황무지》에 나오는 표현이다. 어쩌면 4월은 앓고 있는 자신과 그 누군가를 향한 애도가 필요한 달인 것이다. 애도가 사회적 화두가 된 지는 꽤나 오래되었다. 기본적으로 애도는 우리가 살뜰하게 온몸으로 보살피던 대상을 상실하고, 그 대상의 부재로 인해 발생하는 슬픔을 전제로 한다. 이때 그 대상의 상실로 인해 비롯된 자리에는 좀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공백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만약 우리가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친다면 그 공백은 자연스레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공백은 점차 날카로운 칼이 되어 무너지는 자신을 찌르게 될 것이다. 그만큼 애도는 실존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우리가 제대로 치러야 하는 상당히 중요한 의식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애도의 장소에 관해서는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그곳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러한 애도의 장소는 일종의 무장소성(placelessness)을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무장소성을 담론 차원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캐나다의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였다. 그는 1970년대 당시 맹목적인 개발주의로 인해 빈곤해져 가는 유럽과 미국 사회의 경관을 목도하고서 이 개념을 썼다. 그에 따르면, 무장소성은 실용성이나 경제성을 목적으로 우리가 일삼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장소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해가는 현상을 가리킨다. 물론 이러한 렐프의 견해는 장소와 인간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기에 당연히 학자로서 가질 법한 입장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이 무장소성이야말로 어떠한 대상이 가진 가장 본래적인 장소라고 볼 수는 없을까. 애도에서는 뚜렷한 장소를 가지지 못하는 게 상실된 대상의 고유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아래 시 앞에서 주저하게 된다.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폐가 아픈 일도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눈이 작은 일도눈물이 많은 일도자랑이 되지 않는다하지만 작은 눈에서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좋지 않은 세상에서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땅이 집을 잃어가고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아득하다나는 이제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이를 악물어야 한다이를 악물고당신을 오래 생각하면비 마중 나오듯서리서리 모여드는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좋기도 하였다 ― 박준,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이 시에서 얼핏 시인은 자신을 위한 애도가 아니라 타자의 상실을 위한 애도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건 다른 일이라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의 통점(痛點)을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일차적으로 나와 타자와의 광범위한 연결성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부득이하게 무언갈 떠나보내고 상실한 자니까 말이다. 지금의 나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고 그 때문에 폐가 아프고, 남들에 비해 눈이 작고 눈물이 많은 일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라 치부되던 시기를 지나서 있다. 나는 그처럼 기존의 내가 죽고 사라지는 존재론적 상징을 거쳐 지금의 주체가 되지 않았던가. 또 지금의 주체 역시 머잖아 죽고 사라지고 말 대상이 아니던가. 따라서 내가 그동안 자신을 통과해온 상실의 지점을 더듬어갈 때, 우린 가까스로 타자의 상실이라는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시인은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며 ‘나의 눈물’을 슬며시 ‘당신의 눈물’로 바꿔놓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시는 순전히 타자의 상실을 위한 공감 능력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시는 타자의 상실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슬픔이 우리의 공감 능력을 초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시에서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한번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묻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린 타자의 슬픔이 차지하는 지리적 위상과 마주하게 된다. 말하자면, “당신의 슬픔”은 “땅이 집을 잃어가”는 일처럼 어마어마한 높이를 가지기도 하고, 또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까마득한 깊이를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슬픔” 앞에서 ‘아득’하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그처럼 아득한 슬픔의 위상을 애도의 장소라고 부르면 어떨까. 내가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하고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할 때까지 “당신을 오래 생각해”야 하는 곳. 그곳은 사실 “당신의 슬픔”의 연유가 되는 대상이 거주하는 곳이어서 당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곳, 즉 무장소성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슬픔”을 향한 애도는 잠시 쉬어갈 수도, 언젠가 끝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는 “당신의 슬픔”을 말하면서도, 휴지를 담보하는 쉼표와 종결을 담보하는 마침표를 단 한 차례도 허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4월이 되어 이 시를 다시 꺼내 읽으면서 한동안 내가 마음의 감기를 앓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월호는 아직 출발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9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세월호 진상규명, 세월호 특별법 같은 건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한 애도의 종착점이 아니라 진정한 출발점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 때문에 우리는 정말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할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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