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역사는 얼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조건이 이른바 자유와 평등에 달려있다면, 누구나 동등한 얼굴을 인정받고 누구나 인간다운 얼굴을 보장받는 게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속하는 가장 본래적인 징표 중 하나가 바로 얼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매일 아침, 주민등록증에 올린 얼굴을 새로운 기분으로 씻고 닦아내는 걸까. 어쩌면 혁명이라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처럼 유에서 유를 발명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문득 6월이 되면 그러한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불쑥 끼어든다. “그 학생이 겁에 잔뜩 질러가지고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어!??’…… 쓰러졌답니다.” 영화 〈1987〉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지휘하는 박처장이 기자회견 중 던진 말이다. 그에게는 가혹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른 그 학생이 누구인가보다 그 시신을 그럴 듯하게 처리해야 하는 행정적 절차가 더 중요한 사안이었다. 바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제시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 학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벌거벗은 생명’이라 할 만하다. 먼저, 그는 빨갱이라는 ‘예외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법적 보호를 받을 길이 없는 존재였다. 그는 박처장을 비롯한 그들의 이념이 옳다는 걸 확인하고 그 테두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모든 인간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였다. 그는 오로지 제도적인 죽음으로 승인되고 싸늘한 재로 만들어야 할 육체적인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누구나 호모 사케르로 전락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유일무이한 혁명의 무기를 발명해야 했다. 그건 가장 인간다움의 성질이 표출되는 기관이어서 더욱 특별한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얼굴이다. 우리에게 얼굴이야말로 희로애락과 같은 갖가지 내밀한 감정이 드러날 수 있는 장소이자, 타자와 변별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얼굴에 내재한 잠재성을 지금-여기에 현실화하는 행위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1987년 6월 항쟁은, 앞서 그 학생이라 치부되던 박종철의 얼굴이 동시대 이한열의 얼굴과 접속된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찾고 얼굴과 얼굴이 뒤섞일 수 있었던 혁명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광장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맨얼굴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념 시집을 넘겨보면 혁명―얼굴의 관계성에 관한 두 가지 놀랄 만한 현상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로는, 일종의 혁명의 원리라고 할 만한 얼굴의 ‘분만’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시집 곳곳에서 6월 민주항쟁이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의 계보를 잇는 지점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민중들이 자발성과 연대성을 통해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된 순간이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니까 이 순간 민중들의 삶은 기존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잉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얼굴을 통해 생명과 생성의 역사를 분만하고자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것은 김경미의 시 〈이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에 나오는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굴이 얼굴을 분만하는 혁명의 원리로 나타나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가 이미 잘 알다시피, 세상은 결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 삶은 아주 조금씩 바뀔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한 자기 혁명과 자기 혁명이 모이게 될 때 좀 더 나은 세상을 여는 새벽에 가까워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는, 일종의 혁명의 주체라고 할 만한 얼굴의 ‘명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는 심정으로 아래 시를 읽어볼 수 있겠다.그는 언제나광장으로 가는 큰길 한 귀퉁이광약을 팔던 김씨무심히 지나치는 시민들을 향하여녹슨 쇠붙이며 숟가락을 닦으며반짝반짝 되살아나던 광택의 기쁨을 보여주던광약장수 김씨이 세상 어떠한 녹이든 오랜 먼지든그의 부드러운 손길 앞에서초야의 새색시인 양 부끄러운 옷고름을 풀어마침내 싱싱한 알몸을 드러내듯그렇게 닦고 또 닦는다면자신의 김씨도 언젠가는 금씨가 될 것이라며그가 닦아놓은 놋쇠 밥그릇에 담긴 광택보다더욱 수북한 광택으로 환하게 웃던 김씨이제 그는 그곳에 없다지난 유월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가고자욱한 최루탄 속으로 그도 함께 달려가고그가 닦아야 하는 것이어디 쇠붙이의 녹뿐이겠는가우리가 닦아야 하는 것이어디 녹슨 숟가락 밥그릇뿐이겠는가이 땅의 더 크고 오랜 녹을 향하여온몸으로 달려가 부서지며우리나라 가장 빛나는 광택으로 되살아난광약장수 김씨이제 그는 그가 닦은 참빛 속에 살아 있다영원히 살아 빛난다 ― 정일근, 〈광약장수 김씨〉, 《유월, 그것은 우리 운명의 시작이었다》, 화남, 2007 이 시집에는 정말 계층, 연령, 성별을 초월한 민중들의 형상이 곳곳에서 출몰한다. 이들이 주체의 층위에서나 발화의 층위에서 그저 단일성이 아닌 복수성을,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고유명을 가지고 출현했기 때문이리라. 위의 시에 나오는 ‘광약장수 김씨’ 또한 자신의 노동에 관한 믿음과 헌신 속에서 진정 자기 삶과 일체화된 개별적 주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그에게 누군가의 녹을 닦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닦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끝내 ‘이 땅의 더 크고 오랜 녹’을 향해 온몸을 내던졌지만, 이제 그가 닦은 이름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빛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린 사랑과 모험의 전령사인 프랑스 시인 랭보(Arthur Rimbaud) 식으로 혁명에 관한 ‘광약장수 김씨’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당신의 얼굴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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