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당신의 다친 마음에서는 검은 피가 줄줄 흘러내릴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당신은 마음의 수혈을 할 만한 장소를 찾으려고 바깥을 두리번거렸을 거다. 그 하나의 장소로 우린 새벽시장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가면 다친 마음들이 건강한 육체에 기대고 있어서 좀처럼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새벽시장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휘청거리는 삶을 일으켜 세울 법하니까 말이다. 또 하나 당신이 마음의 수혈을 할 만한 장소로는 병원을 꼽지 않을까. 새벽시장과는 다른 의미에서 병원은 경이의 장소이다. 거기에 가면 우린 불현듯 깨닫는다. ‘세상에나,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았다니?’ 그래서 우린 병원에서 다친 마음들이 건강한 육체에 기댈 수 없어서 유독 눈에 띄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정말 아플 때는 그 아픔을 숨기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들키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병에 걸렸다는 건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 아무에게도 허점을 들키지 않도록 단일한 자아로 살아간다.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아 이외에는 감추거나 억눌러야 하는 것이 당신에게 다반사이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가 단일한 자아로 향하는 길목에선 가끔 예기치 않게 나약한 자아라든지 서글픈 자아 같은 것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병에 걸렸다는 건 진정 그러한 자신들과 대면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조지훈 시인은 일찍이 자신에게 침묵의 말을 거는 병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의 소식을 전해 들은 건 아니었을까. 그가 세상을 뜨던 해에 발표된 〈병에게〉(1968)에서는 우리의 인생에서 어둠과 빛, 즉 ‘허무’와 ‘외경’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걸 나직이 속삭이고 있다. 이처럼 이 글에서 당신의 다친 마음을 병원까지 이끌어오게 된 건 최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한 의사에게서 연유했다. 요사이 매스컴을 수놓은 그에 관한 애도의 말을 지켜보면서 나의 무거운 기분이 어떤 성급한 일반화에서 비롯된 건 아닐지 자문해보았다. 그 때문에 나는 아래의 시를 다시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 윤동주, 〈병원〉, 1940. 12 사실 사람들은 그동안 이 시에 나오는 ‘의사’에 관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예 선입견을 가지고 그에 관한 가치평가를 내리려고 했을 것이다. 이는 윤동주의 입장에서 접근해보면 일면 타당할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이 시는 윤동주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진 시였기 때문이다. 1939년 11월, 일제의 창씨개명 공포 이후 윤동주가 그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무려 1년 2개월가량 침묵을 지키다가 가까스로 토해낸 작품이 바로 〈병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차후 자신의 시집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하기 전에 ‘병원’을 염두에 두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그간 이 시에 나오는 ‘의사’에 대해 시대적 아픔에 무관심하거나 타자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실의 명증성이 꼭 시적 진실의 타당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이 시에서 의사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관한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아픔을 참다가 처음으로 병원에 찾아왔다. 그런데 늙은 의사는 나의 병을 모른다고,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 우린 전자의 병이 심리적인 것에, 후자의 병이 육체적인 것에 속하는 걸 주목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린 그가 의사로서 진단을 내렸을 뿐 당신의 마음의 병은 결코 알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모를 아픔”을 어찌 의사라고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린 늙은 의사의 말이 타자의 무지에 대한 고백으로 읽을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시인이 이걸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타자의 무지에 대한 앎이 있었기에 이 시에서 내가 젊은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보는 행위에 다다를 수 있었다는 건 확실해졌다. 이 지점에서 우린 의사 주석중 교수가 남긴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떠올릴 법하다.“제가 환자의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글귀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이라서 우리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 그 이외의 것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애쓸 것이다. 그때 인간의 무력감은 밤낮으로 애쓰는 절실함이 된다. 그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부디 주석중 교수의 명복을 빈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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