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회용품이 아니다.” 2006년 프랑스 전역을 수놓은 시민운동의 현장에서 시민들이 외친 구호 중 하나이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이 운동은 당시 프랑스 정부가 내세운 최초고용계약(CPE)에 관한 법, 즉 ‘고용인이 26세 이하의 피고용인을 채용한 후 2년의 시험 기간 동안에 아무 때나 해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사실 이 법안은 청년들의 근로계약에 관한 불평등을 넘어 사회의 모든 근로 형태에 관한 고용불안을 야기할 우려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법안을 둘러싼 당시 상황을 들여다보면, 이 문제가 결국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침투한 자본의 불평등과 연결되어 있어서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길 만하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비단 프랑스에 국한된 것이 아닌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로지 생산 시스템의 효율성을 가동하고자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정당한 노동권조차 권력의 발길 아래 짓밟히고 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들려온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가속화된 이래 반복되어온 문제이다. 그 때문에 최근 한 건설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보도를 지켜보면서, 한동안 무거운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백무산 시인의 시집을 넘겨볼 수밖에 없었다.     백무산 시인은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 출신으로, 1970년대 당시 열악하고 잔혹한 그의 노동 체험이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자신을 비롯한 노동자들이 ‘지옥선’을 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의 노동 현장에는 아득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정말 여기는 그의 표현대로 “간밤에 나와 함께 짜장면을 나눠 먹었”던 동료가 하루아침에 “짜장면처럼 까맣게 타서 거적에 덮여 실려” 가는 곳이고, “해가 바뀌고 동짓달이 오기 전까지/ 족히 쉰 명은 넘게” 죽어 나가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고귀한 인격과 존엄을 인정받는 인간이기는커녕 맹목적인 자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파리보다 못하게 여겨지던”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은 그들에게 억척스럽게 살아야 하는 생존의 공간이자 “아무도 모를 우리 목숨”이 걸려드는 “죽음의 문턱”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린 신자유주의의 초기 무대인 ‘지옥선’에 승선한 백무산 시인의 목소리로부터 냉소, 분노, 다짐과 같은 뉘앙스를 강렬하게 느낄 법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살아 있는 밥”이나 “피가 도는 밥”으로 벼린 목소리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허점을 뚫고 노동의 본질에 가닿으려는 깊은 사유가 배어 있기도 하다. 살 속에 말이 있다살은 스스로 말을 한다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는다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그것은 살과 살의 대화다뼈와 살의 대화다남의 살과 나의 살의 대화다살은 창조를 한다스스로 세포를 증식하듯이스스로 유전인자를 만들듯이살은 스스로 음악을 만든다살은 속삭이듯 말을 하지만 우리를 지배한다어설픈 이성은 독재자처럼 살을 지배하려 하지만오래 억눌린 살의 말은또 다른 피 흘림으로 대답한다 ― 백무산, 〈노동의 근육〉,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9 이 시에서 시인은 일종의 소(小)이성이라 할 만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일종의 대(大)이성이라 할 만한 생명의 ‘살’을 대비하여 노동의 신성함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살은 우리의 이성보다 앞서서 이미 세계와 맞닿아 있는 지각의 장소이자 우리가 지금-여기에 속해 있음을 알려주는 실존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린 살이 스스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진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우리는 자기 몸에서 “살과 살의 대화”와 “뼈와 살의 대화”가 빚어내는 “노동의 근육”을 통해 나날의 양식을 얻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린 “남의 살과 나의 살의 대화”를 통해 아름다운 삶의 “음악”을 창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우리에게 살은 자아가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경험의 통로이자 온기와 같은 인간의 깊이를 촉발하는 매개체니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린 실상 살의 입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시의 마지막 부분을 찬찬히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어설픈 이성은 독재자처럼 살을 지배하려 하지만/ 오래 억눌린 살의 말은/ 또 다른 피 흘림으로 대답한다”는 부분을 말이다. 이 부분은, 살이 진정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 각자를 삶의 능동적인 주체로 만드는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외부의 권력이 그곳을 강압적으로 짓밟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러니까 우린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늘 조심스럽지만, 한 건설노동자가 오죽하면 자신의 ‘살’에 불을 지를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언젠가부터 자본주의 시스템이 인간을 크리넥스 티슈로 만드는 상황에서 그의 죽음이 ‘지옥선’을 뚫고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나비가 되도록 아래의 시 구절을 남겨두고 싶다.아무것도 팔려가지 않는 노동성숙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노동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노동죽은 노동을 쓸어내는 노동꽃을 피우는 노동이제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리라이제 우리의 몸에서 꽃이 피는 소리를 들으리라 ― 백무산, 〈노동의 추억〉,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9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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