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현재 선생님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강의실에 들어설 때면 이들의 형형한 눈망울에서 예비교사라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감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이들에게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부쩍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어쩌면 이들에게 전달된 어설픈 지식이 언젠가 그 누군가에게 잘못 전달되지는 않을지 염려하는 심정 때문이다. 물론 이는 지식 그 자체를 제대로 섭렵했는가의 문제보다는 지식이 누군가의 삶에 끼어드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럴 때 무미건조한 지식이 말랑말랑한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들이 알아차렸으면 한다. 가끔 학생들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길에 짙은 안개가 깔리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필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살며시 들려주곤 한다. 그대가 지금 여기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건 사회의 보이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흘린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거라고, 어쩌면 그대가 선생이 되려고 하는 건 그 누군가에게 입은 은혜를 더 찬란한 형식으로 되돌려주기 위한 일에 다름 아니라고, 그러니 선생은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라고 말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가끔 들려줘야 좋을 것이고, 때론 다음과 같은 시를 같이 읽는 게 보다 짙은 여운을 남기기도 한다.한 편이 시 그것으로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아야 할 줄 깨칠 그때라야시인아 너의 존재가비로소 우주에게 없지 못할 너로 알려질 것이다.가뭄 든 논 어귀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듯―새 세계란 속에서도마음과 몸이 갈려 사는 줄, 풍류만 나와보아라시인아 너의 목숨은진저리 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아직도 하는 것이다.언제든지 일식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시인아 너의 영광은미친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밤이라도 낮이라도새 세계를 낳으려 소댄 자국이 시가 될 때에― 있다.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아라. ― 이상화, 〈시인에게〉, 《개벽》, 1926 사실 우리는 이 시에서 시인을 선생님으로 치환하여 읽어도 무방하다. 시인에게 한 편의 시를 창조하는 것이 결국 “새로운 세계 하나”를 낳는 일과 같은 것처럼, 선생에게 한 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장차 ‘새로운 세계 하나’를 세우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이 낳은 작품을 보고서 답답한 현실로부터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기도 하고, 상투적인 일상을 깨부수는 낯선 감각에 매료되기도 한다. 그건 시인이 창조한 세계가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생이 가르친 한 명 한 명의 학생은 장차 사회의 일원이 되어 그 누군가의 육체와 정신을 풍요롭게 할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선생은 ‘비로소 우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대체로 그러하듯, 진정한 시인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진정한 선생이 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를 그저 “풍류”라고 생각하고 허투루 썼다가는 시인으로서 그의 목숨은 “진저리 나는 절름발이 노릇”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그의 시는 본래의 해로부터 멀어진 “일식된 해”와 같이 본연의 시로부터 동떨어진 시가 되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마음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새 세계”를 낳아야 한다.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게 아니고 지혜와 덕성을 갖춘 인격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그는 바늘로 구슬을 깎는다는 심정으로 나날이 혼신의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진정한 시인의 길을 내다본 시인이 그 길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처럼, 진실한 선생의 길을 내다본 선생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 길이 아무리 “어린애의 짬 없는” 마음이 “미친개 꼬리도 밟는” 것 같은 위험천만한 일일지라도 외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한 모험은 “밤이라도/ 낮이라도” “새 세계를 낳으려” 애쓰는 자국을 남길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아마도 학생들은 선생이라는 직업이 가진 사명감을 되새겨보게 될 테지만, 아직 내가 그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는 걸 여기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바로 진정한 선생이 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같은 거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그들이 장차 교단에 서서 각자의 시행착오를 통해 익혀야 하는 요령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 한 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나는 그들에게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교권의 실상을 말해주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인한 사람들의 슬픔과 분노가 얼마나 큰 것인지 매스컴에서 목도할 수 있다. 그건 그만큼 교육이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관심사이기 때문이고, 교권 침해의 문제가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온 폐단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나는, 시인이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처럼 한 편의 시를 위해 자신을 불사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마냥 희생정신이나 책임감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길이 이번 호우로 인해 오송 지하차도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숨진 버스기사에게도 향하길 바랄 뿐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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