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떠들썩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매스컴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후쿠시마, 거기에 대해서 나오는 거 보십시오. 도대체가 과학이라고 하는 건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런 세력들하고 우리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 이에 대해 매스컴에서는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목소리를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기 전에 신빙성 있는 검증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거나 일본이 아닌 국민을 싸움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잘못된 태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때 필자는 다른 것보다도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마음이 쓰였고, 문득 다음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종교란 하나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하나를 보잔 것 아닌가? 이 세상 맘몬의 자손들처럼 수(數)로 따지자면 진리랄 것이 무엇이며, 정신이랄 것이 무엇인가? 간디의 말과 같이 진리에서는 최소가 최대로 최대가 최소 아닌가? 나는 예수께 배우기를, 잃어지지 않은 99보다 잃어진 하나가 더 중하다고 배웠다. ― 함석헌,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 《사상계》, 1957. 6 함석헌은 우리나라 현대사상사를 몸소 살찌운 귀한 존재다. 그의 일평생이 무교회주의를 통해 권위에 치우친 기독교를 쇄신하고자 했으며, 비폭력 저항주의를 통해 군부 독재의 횡포에 적극 맞서는 데 바쳐졌기 때문이다. 초기에 속하는 이 글에서 우리는 그가 산술과 같은 실용의 논리를 벗어나는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건 일면 “잃어지지 않은 99보다 잃어진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종교의 논리일 수 있겠다. 종교란 ‘나’라는 껍질을 벗고 모든 이에게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함석헌에서 “잃어진 하나가 더 중”요한 것은 그것보다 근본적인 진리를 겨냥하고 있다. 왜냐하면, 진리의 차원에서 보건대, 1은 100에 다다를 수 있는 최대한의 가능성을 함유하고 있지만, 99는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한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원천으로서 ‘정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1+1=100’은 진리에 가까운 답안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그에 관한 해설로 아래 시를 읽어볼 수 있겠다.   씨앗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포동포동 부끄럽다씨앗 하나의 단호함씨앗 한톨의 폭발성씨앗은 작지만씨앗의 씨앗인 희망은 커아직 뜨거운 내 손바닥도껍질로 받아주는씨앗은 우주를 이해한마음 한점마음껏 키운 살버려우주가 다 살이 되는구나저처럼나의 씨앗이 죽음임 깨달으면죽지 않겠구나우주의 중심에도 설 수 있겠구나씨앗을 먹고 살면서도씨앗을 보지 못했었구나씨앗 너는 마침표가 아니라모든 문의 문이었구나 ― 함민복, 〈씨앗〉,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시인은 현재 씨앗의 방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시계에는 마음의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 씨앗은 보잘것없이 작지만, 씨앗의 톱니바퀴가 되는 희망은 무한정 크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갑갑한 현재에 매몰된 시선을 아득한 미래로 향하게 될 때, 씨앗을 ‘생명의 맹아’라고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생명의 맹아라는 말만큼 단호하고 무서운 말이 있을까. 씨앗은 머지않아 자신의 전부를 폭발하여 “마음껏 키운 살”을 버리고 온전히 그 누군가의 “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씨앗은 실체로 따지자면 죽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군가의 “살”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이러할 때 우리가 씨앗에 대해 “우주”와 같은 경이로운 존재의 높이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 시인 역시 그런 씨앗에게 부끄러움과 함께 경외감을 느끼며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는 “씨앗 하나/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포동포동 부끄럽다”라며 그간 진정 자신을 살찌운 게 씨앗이었다는 걸 고백한다. 그리고 “나의 씨앗이 죽음임 깨달으면/ 죽지 않겠구나”라며 자기의 죽음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의 삶을 싹틔우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씨앗을 함석헌이 말한 ‘씨알’로 바꿔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함석헌에게 씨알은 민중과 동의어이기에 이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을 부여받은 고귀한 존재였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씨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중하고 섬길 수밖에 없으며, 우리 또한 씨알로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1+1=100”이라는 정식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사실 이 논란의 배후에는 과학과 비과학의 대립보다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개입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어쩌면 그가 “1+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각각 씨앗을 품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자기의 행동을 성찰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씨앗의 방에 들어가는 비밀번호, 즉 “1+1=100”이라는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그가 씨앗의 방문을 열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의 〈군말〉에 나오는 시구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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