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입을 가지고 산다. 하나는 육체에 달린 입으로, 나날이 생존을 위한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끼니라는 말에는 얼마나 처절한 피로와 짙은 고달픔이 배어있는가. 다른 하나는 영혼에 달린 입으로, 종종 실존을 위한 음식을 먹는다. 그래서 허기라는 말에는 얼마나 황량한 운명과 아득한 슬픔이 서려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언젠가부터 유행한 소울푸드라는 말은 영혼의 허기에 바쳐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원래 미국 남부 흑인들과 관련한 음식에서 유래했으나, 어느 순간 영혼에 안식을 주거나 영혼을 뒤흔들 만한 강렬한 음식을 가리키게 되었다. 우리는 영혼의 허기가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걸 알았던 한 사람으로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를 떠올릴 만하다. 그의 일생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고서 머나먼 유년 시절의 기억에 휩싸이는 장면은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이에 대해 무의지적(비자의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붙여준 이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번역하려다가 결국 실패하고 만 독일의 평론가 발터 벤야민이었다. 그는 프루스트에게 바친 글에서 이를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 회상”이라 정의하고서 이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지나간 과거가 아침 이슬과 같은 “순간”에 비쳐 나오는 곳에서 회생의 고통스런 충격이 그 과거를 막을 수 없이 다시 한 번 끌어모으게 된다.― 발터 벤야민, 〈프루스트의 이미지〉, 최성만 옮김,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길, 2012 이처럼 우리가 무의지적 기억에 사로잡힌 순간은 지나간 과거가 우리의 영혼과 대적하여 치명상을 입히는 때여서 고통스럽고도 황홀하기까지 하다. 말하자면, 이 순간은 우리를 일상과는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가는 때이기보다는 우리가 속한 무미건조한 일상에 숨통과 같은 물꼬를 트는 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누군가의 손맛을 떠올리기도 하고, 이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는 것이다. 앞서 벤야민이 프루스트를 ‘그물 던지는 사람’에 빗댄 바 있지만, 우리는 누구나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자기만의 “그물을 던지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드넓은 바다에 특별한 그물을 던져 기억의 물고기를 건져 올린 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겠다. 마침 그의 시에는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하여 환한 보름달이 떠올라 있다.   번철에는 세상 귀찮다는 듯 전신 뒤척이며지글거리는 돼지기름이불만 터뜨릴 대상 기다리고 있었다.신김치와 숙주, 거기에 고사리며파까지 썰어 넣고맷돌에 사정없이 갈은 녹두반죽 뒤섞어한 국자 던져 넣으면서 아버지는가슴에 새겨진 멍울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눌렸다.“뒤적이지 말라우! 고대로 익히라우.”뜨거운 비계가 녹두살 태우는 냄새 코를 찌르고번철의 번들거리는 피부가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추석 문지방 물들여도아버지는 묵묵히달만 한 빈대떡을 들여다보았다.“딱 한번 뒤집는기여. 사는 일은.”그 말과 함께 뒤집개가번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고잠시 동안 공중에서휴전선 너머 평안도 맹산 갔다 온 빈대떡은뜨거운 불 위에서설익은 가슴 지지고 있었다.“데데하게 두드리지 말라우.이거이 무슨 화투장이가? 미련한 남쪽 아이들이래전 부치며 두드리지. 우리는 아이 그랬음.”송편 하나 빚지 않고고향 하늘에 떠올랐던 숱한 달을 혼자 불러오며담장 너머로 지글거리는 가슴의 신음소리 다스리던어느 해 실향민의 추석.― 박기영, 〈빈대떡〉,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모악, 2016 이 시에서는 두 사람의 기억이 서로 다른 “빈대떡”을 구워내고 있다. 하나는 아버지의 기억으로, 그가 부친 빈대떡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실향민”으로서 서러움이 주된 맛을 이룬다. 추석이 되어도 그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걸 보니 그는 가까운 가족만 데리고 갑작스레 남쪽으로 넘어온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유독 고향 생각이 간절해지는 명절이 되면 자연스레 고향 사람들과 만들어 먹던 음식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가 부친 평안도식 빈대떡은 여타의 빈대떡에 비해 두께가 두껍고 크기가 커서 마침 환하게 떠오른 보름달과 같았을 테지만, 그와 고향 사이엔 휴전선이 가로놓여 있기에 그는 사실 반쪽의 보름달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빈대떡을 부치는 건 반쪽의 보름달을 가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과 같았고, 나머지 반쪽을 찾고자 하는 안간힘과 다름없었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하나는 아들의 기억으로, 그가 부친 빈대떡에선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라는 풍미가 물씬 풍긴다. 엄밀하게 보자면, 그가 부치는 빈대떡은 아버지 이전부터 고향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온 어마어마한 지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것을 잊지 않은 아버지의 손길을 거쳤기에 지금-여기의 그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에서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도식 빈대떡을 만드는 과정이 세밀하게 등장하는 가운데 음식과 일체화된 아버지의 자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신김치”, “숙주”, “고사리”, “파”를 썰어 넣고 “녹두반죽”을 뒤섞어 빈대떡을 부치면서 그 조리법에 담긴 단호함, 침착함과 같은 삶의 지혜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집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아버지의 평안도 사투리는 남한 사람들에 대한 투박한 태도인 것을 넘어 그의 삶의 본류를 향한 고집스러움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처럼 우리는 늘 음식을 먹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기억이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어쩌면 기억의 식탁에 초대된 손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기영의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넘겨보면, 그는 기억의 식탁 위에 어육계장, 육포탕, 곰순대, 꿩냉면 등 갖가지 평안도식 음식이 차려진 것을 보았고, 그 너머로 아버지의 의자가 텅 하니 비어있는 걸 보고 있다. 부디 이번 추석에는 풍성한 보름달만큼이나 모든 이들의 영혼이 살찔 수 있길 빌어본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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