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볼 뿐이다.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 소설가 신경숙 -누구의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에곤 쉴레의 그림 아래 소설가 신경숙의 글이 쓰여 있었다.에곤 쉴레의 그림 `사랑의 행위`와 신경숙의 글은 놀랍도록 기묘한 상호의 오브제였다. 물론 그녀의 글 없이 그냥 보기에 쉴레의 그림은 대상의 기괴한 표정과, 옅게 퍼져가는 듯하다 처절하게 소용돌이치는 아우라는 마치 욕망의 과잉처럼만 보인다. 신경숙이 바라봤던 것처럼 폐허의 응시처럼 진중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보기에 따라 부유하는 상호가 일견 그것이 놀라운 유대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림과 동시에 사랑에 관한 그녀의 기술이 오브제처럼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에곤 쉴레의 그림 ‘ 사랑의 행위’ 남자의 표정은 짐작건대 과잉의 소비에 불과하다. 그러나 과잉은 역설적이지만 결핍이며, 폐허처럼 텅 빈 자아의 고독감이기도 하다. 그에게 ‘사랑의 행위’는 고독감의 교섭이거나, 혹은 과잉된 욕망의 소비이다. 그래서 처절한 고통을 잉태하는 동시에, 또한 놀라운 황홀경을 선물한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거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교섭 절정의 이면에는 이처럼 인간적 유대와 지배의 야욕이 혼융되어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가벼우면서도 너무나 무거운 역설을 우리의 감각 속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그림의 오브제인 신경숙의 응시를 따르면 욕망으로 가득 찬 파괴적 자아가 발산하는 비열한 웃음은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고독감의 유대로 타자를 유혹한다. 자신의 폐허를 비 은폐시키며, 타자가 그곳에 머무는 순간, 모든 것은 변해버린다. 가벼운 연민은 타자에 대한 깊은 책임감으로, 때론 놀라운 공포심으로 변해버린다. 사랑하거나, 혹은 달아나 버리거나 그 모든 것은 상처로 변한다. 신경숙 작가는 쉴레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오묘한 역설을 그녀의 글을 통해서 형상화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묘한 표정 속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과잉의 소비 이상의 의지를 할애하지 않는 그의 행위는, 폐허를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창을 더욱 닫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는 그래서 더욱 고독해 보이며,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견딜 수 없는 과잉의 소비는 나아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몰두는 역설적이게도 신성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신경숙의 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수단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만남과 금기를 위반하는 탈주의 환희는 묘한 웃음으로 표출되고 있다. 타자의 깊은 내면, 즉 폐허를 만나기 위한 통로가 아닌, 오히려 과잉의 소비 자체로서의 만남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교섭은 처절한 고독감을 유대로 관계를 변전시킨다. 이러한 변전을 통해 불연속의 불안을 연속으로 교합한다. 교합과 연속은 결코 타자의 창을 두드리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창안은 폐허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이기에 당면한 숙명이다. 그러나 그것을 들키는 것은 견디기 힘든 두려움을 야기한다. 마치 전쟁터 중앙에 비무장으로 서 있는 것과 같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성찰처럼 신 앞에 홀로선 단독자의 불안과 같기도 하다. 따라서 신경숙 작가는 위에 글로써 인간의 위기를 표출했고, 쉴레는 그림을 통해 그 경고에 충실히 따르는 것만 같다. 그녀의 글처럼 폐허를 들키고 난 후, 사랑의 상처는 지독한 법이다. 나는 지독한 사랑의 상처에 동의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다시 물음을 던져본다. 에곤 쉴레의 그림의 그 묘한 표정은 과연 무엇일까? 폐허의 비 은폐를 통한 고독감의 유대일까? 아니면, 과잉의 소비를 교섭하는 존재자의 연대일까? 그것이 무엇이건, 쉴레의 메타포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에곤 쉴레는 금기를 위반하고 있다. 그는 가장 연약하며, 가장 위험한 인간의 욕망을 쉼 없이 비 은폐시키고 있다. 이러한 비 은폐는 작가주의의 지향성이라기 보다는 철저한 자기 내적 체험의 견딜 수 없는 표출일지도. 따라서 정치적이지도, 더욱 철학적이지도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때때로 난삽하고 저질적인 에로티시즘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쉴레는 가장 인간적인 욕망을 가장 거침없이 표현하는 표현주의 작가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욕구의 경계를 철저한 내적 체험을 통해 구현해냈던 그의 탁월성에 비롯한 것이다.그의 그림이 신경숙의 글과 만났을 때 그의 탁월성은 또 다른 인간적 유대감으로 우리에게 미술이 주는 아름다움을 극한의 아름다움으로 전해준다. 그것이 기획된 것이든, 우연의 산물이든.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