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전설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남긴 명언이다. 이 짧은 말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치 기름을 끼얹은 장작불에 비유하고서 우리가 거기에 가까이 다가서려다 다치지 말고 적절한 거리에서 그 온기를 쬐길 바라는 염려의 심정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세상살이에는 뭐든 지나치지 않는 게 좋은 법이다. 하지만 가끔 저 말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희극과 비극이라는 양극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모순덩어리이거니와 사람들에게 상대성을 띨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찰리 채플린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통했을 것이다. 또 우리는 흔히 인생을 장미에 빗대기도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밋빛 인생을 꿈꾸고, 장밋빛 인생이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오르는 일을 자주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밋빛 인생이라는 비유에는 역시 앞서 찰리 채플린의 말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목적)을 일종의 시선으로 사유하려는 자세가 내포되어 있으나, 그 시선은 화려한 빛깔을 풍기는 인생을 미래의 어딘가에 두려는 시간성에 입각해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상당히 예리하게 포착한 다음 시를 읽어보자.눈먼 손으로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그건 가시투성이였어.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나는 미소 지었지.이토록 가시가 많으니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해도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눈먼 손으로삶을 어루만지며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장미꽃을 기다렸네.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 주오,삶은 가시 장미인가 장미 가시인가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장미와 가시인가를. ― 김승희, 〈장미와 가시〉, 《문학과비평》, 1989. 3 우리는 이 시에서 “삶”(인생)을 “장미”에 빗대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아마도 시인은 장미가 지닌 모순적인 속성이 우리 인생의 본질과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구에서 장미는 그 매혹적인 빛깔과 자태로 인해 궁극의 미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속에 날카로운 가시를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장미가 지닌 양면성은 우리 인생이 품고 있는 고통, 시련 따위의 어두운 측면과 행복, 희망 따위의 밝은 측면을 동시에 나타내기에 최적의 소재인 것이다. 시에서 시인은 시간성의 관점에 따라 현재의 인생을 “가시투성이” 장미에, 미래의 인생을 “장미꽃”에 비유하면서 우리가 빠져드는 모순의 상황을 들춰내고 있다. 우리는 “눈먼 손으로/ 삶을 만져” 본다. 이건 우리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거니와 그럼에 따라 우리가 각자의 몫으로 눈앞에 놓인 삶에 맹목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만진 “삶”은 온통 “가시투성이”, 즉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되어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처음 여행하는 이방인이고 아무도 세상살이의 비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누구나 어설프기는 매한가지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느 순간 “가시투성이 삶”을 정당하게 만드는 논리를 고안해냈다. 그건 우리의 삶을 유동적인 시간의 흐름 가운데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삶은 “이토록 가시가 많”아서 혹독할지 모르겠지만 머잖아 이 순간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곧 장미꽃이 피”는 보상을 안겨주게 될 거라고 말이다. 애초 이러한 발상은 우리가 인생에서 느끼는 애환을 위로해주었을 것이기에 거친 인생을 조금은 순조롭게 헤쳐 나가도록 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인생의 이정표로 자리를 잡아 더 찬란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우리는 이제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속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국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다. 사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즉 우리의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결국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정말 시간이 지나 우리가 원하던 보상을 얻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곧 또 다른 대상을 지향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앞선 말은, 우리가 장미꽃을 보았음에도 그것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틀린 말이다. 애초 우리의 시야가 아득한 미래를 향해 있었기에 뜻밖의 선물을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현재의 순간을 우리는 놓쳐버렸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재는 고통, 미래는 행복으로 구획하는 이분법적 시선을 넘어 우리의 인생 자체를 좀 더 유연하게 바라볼 필요성을 느낀다. 이때 아래의 작품은 우리의 편협한 시야를 활짝 열어젖힌다.   네덜란드 출신의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판화는 정교한 수학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제목에서 나타나듯 이 작품에는 네덜란드풍 마을의 낮(왼쪽)과 밤(오른쪽)의 풍경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통상 낮은 ‘빛’에, 밤은 ‘어둠’에 속한다는 점에서 별개의 현상일지 모르지만, 에셔에게 이는 서로를 비추는 관계에 놓일 때 독자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는 중간에 ‘거울 이미지’를 숨겨 놓음에 따라 낮에서 밤으로, 또 밤에서 낮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순환성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새의 형상을 통해 낮에도 어둠이, 밤에도 빛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아마도 사람에 따라 이 어둠과 빛의 비율은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의 인생 또한 상대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누군가에게 인생은 미래의 보상을 위해 현재 쓰라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일 수 있고, 또 그 누군가에는 순전히 고통으로만 치환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과 인식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앞선 시에서는 결국 삶이 “가시 장미인가 장미 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라며 묻고 있는 것이다. 삶은 원래 고통과 행복으로 나눌 수 없는, 그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는 모순덩어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 글의 관점도 끝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궁색함을 면치 못한다.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현실을 떠올려본다면 말이다. 거기서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주민들의 삶에는 얼마나 따뜻한 빛이 섞여 있는 걸까. 가자지구 출신의 소년 아우니 엘도스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죽고 나서 ‘100만 유튜버’의 꿈을 이룬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의 구원은 항상 한발 늦다. 부디 가자지구의 평화를 빈다.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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