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평소에는 지극히 사소하던 것이 문득 특별한 것으로 변할 때가 있다. 유리창이 그러하다. 당신이 좀처럼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슬픔에 휩싸일 때 유리창은 당신에게 충만한 공간으로 변주한다. 당신이 유리창만큼이나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했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그럴 때 우리는 뭔가 하지 않으면 유리처럼 와장창 깨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창가로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며 당신의 마음속에 얼룩진 것들을 끄집어내 유리에 쓰고, 지우면 된다. 이 글은 우리를 낯선 장소로 인도할 유리창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자기의 세계에 갇혀 지내다 평생 조현병에 시달린 한 수학자의 것이다. 그는 학생의 창의성을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수업에 나가지 않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남들이 생각해낼 수 없는 이론을 창안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이때 그가 수학기호를 쓰는 유리창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한 벽돌과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가 적은 수학기호가 비둘기의 동선이거나 럭비 경기하는 선수들의 대열이거나 소매치기를 쫓는 여인의 움직임인 것과 같이 타자, 나아가서는 세상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모티프가 된 존 내쉬다.   이런 점에서 존 내쉬에게 유리창은 한편으로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펼쳐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걸 정작 모르는 건 존 내쉬 자신이어서 (어쩌면 조현병이 그의 한쪽 눈을 가려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독단적인 자기 세계를 깨트려야 할 통과의례가 남아있었다. 영화에서는 그걸 상당히 극적으로, 또 역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가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고, 사람들이 모이는 바깥으로 나가고 나서야 기존 경제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독창적인 이론을 발견했으니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존 내쉬에게 유리창이 세상에 다리를 내고 그의 욕망이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혈육의 상실로 인해 유리창에 삶의 방향성을 묻는 한 시인의 것이다. 그는 미처 손쓰지 못하고 아들을 다른 세상으로 떠나보낸 아버지로서 유리창을 마주하고 있다. 슬픔은 결국 산 자의 몫이어서, 그는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슬픔을 직시하고 자신의 마음에 차오르는 무기력함과 공허함을 달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지만, 그처럼 유리에 입김을 내뿜고 그걸 지울 수 있기에 나약함을 잠시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행간에 잦은 쉼표로써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을 흩뿌리면서도, 유리를 닦는 행위를 통해 슬픔을 통과하려 하는 걸까.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정지용, 〈유리창 1〉, 1930. 1 하지만 우리가 이 시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유리의 표면보다는 그것의 이면에 있다. 시에서 유리의 표면이 산 자의 장소이고, 유리의 이면이 죽은 자의 장소라면, 유리는 정확히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다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 유리의 이면은 “새까만 밤”이 “물먹은 별”을 뒤덮고 있는 곳이라면, 자신의 아들을 집어삼킨 어둠, 즉 죽음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있어서, 자신의 아들이 “고운 폐혈관이 찢어”지기 전까지 살려고 했던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절실한 심정으로 아들의 고통과 아픔을 어루만지려고 하는 걸까. 이 지점에서 우린 정지용에게 유리창이 삶에 다리를 내고 그의 슬픔이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세 번째 이야기는 이별의 충격으로 인해 유리창에 사랑의 자세를 묻는 한 가수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가 남긴 “서른 즈음에”의 청춘처럼 현재진행형이기에 다소 부기에 가깝다.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 저마다 아름답지만 내 맘 속에 빛나는 별 하나 오직 너만 있을 뿐이야 창 틈에 기다리던 새벽이 오면 어제 보다 커진 내 방 안에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1992 잘 알겠지만, 사랑은 서로의 일이지만, 이별은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죽음이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완성되는 것처럼, 이별 역시 자신이 그걸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 즉 이별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자신의 작은 “방”에 가두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잊어야 한다는 마음”을 방에 가두려 하면 할수록 잊을 수 없다는 역설이 발생하고, 그래서 그는 “하얗게 밝아온 유리창”에 “널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광석에게 유리창이 이별에 다리를 내고 그의 사랑이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살펴본 세 이야기는 낮과 밤과 새벽에 각기 다른 빛을 내는 유리창에서 연유하였다. 거기에 그들이 욕망, 슬픔, 사랑이라는 주석을 달아준 것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결국 인생을 넘어서지 못하는 지점에 있을지 모르겠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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