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잊고 사는 몸의 감각]우리는 자주 몸에 속고 산다. 지금 눈앞에 있는 현상이야말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실의 정확함이 세계의 진리를 증명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꼭 삶의 진실에 가닿는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괴물처럼 비대해진 눈을 감는 순간 그동안 우리를 스쳐 지나갔거나 눈앞에서 놓쳐버린 사소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순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눈을 감고 바깥으로 향한 시야를 안으로 되돌려놓아야 하는 법이다.이처럼 우리가 눈의 감각보다 귀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세계의 진리에 가린 삶의 진실을 회복하기 위한 계기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요구하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다가 불현듯 삶에 그어진 흉측한 균열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경우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죽음을 목전에 둔 철학자 고(故) 김진영의 고백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누구에게나 몸속의 타자가 있다.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다. 먼저 깨어난 그 눈으로 생 속의 더 많고 깊은 것을 보고 읽고 기록하는 것―그것이 환자의 주체성이다.―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그에게 느닷없이 침범한 죽음은 자신의 삶을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뒤바꿔놓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건이다. 죽음만큼 기존 삶의 기반을 뒤흔들며 단단하다고 믿었던 기존의 자신으로부터 그 붕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을 분리하는 강력함이 어디 있을까. 그 순간 그는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몸속의 타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말마따나 바로 “환자는 그 타자가 먼저 눈을 뜨고 깨어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 말은 순전히 불가항력의 죽음에 대한 순응보다는 남겨진 삶을 향한 애정에 가깝다. 그러니 죽음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 속에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평온, 사랑과 미움 따위의 대립적인 가치들이 동등한 빛깔을 가지고 뒤섞여 있는 것이다.[울음소리를 듣는 귀에 바치는 시집]이처럼 이 글에서 문득 우리의 삶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귀의 감각을 떠올리게 된 것은 역시 귀의 섬세한 주의력으로 갖가지 삶의 단면을 충실하게 기록하려 했던 한 시인의 시집에서 연유하였다. 이 시집은 펼치자마자 귀의 생명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건 사람이 죽고 나서도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귀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는 귀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는 몰라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생에 관한 궁금증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귀〉). 그러니 우리가 망자 앞에서 상실의 슬픔을 내비치는 건 성급한 일일 것이고 그의 귀에 대고 고맙다고, 사랑한다며 삶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줘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이처럼 이명윤의 세 번째 시집은 귀에 바치는 시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시집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본다면 이는 반만 맞는 표현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시집에서는 풀벌레, 빨간 장미, 바다를 비롯하여 순국선열, 맛집 옆집, 독거노인,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 여순사건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심연과 세계의 밑바닥에 들끓고 있는 울음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은 울음소리를 듣는 귀에 바치는 시집이라고 해야 옳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 시집에서 이른바 울음의 현상학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시를 읽는 일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울음의 원심력과 삶의 윤리성]고라니가 운다 오래전이불 밑에 묻어 둔 밥이라도 달라는지마을의 집들을 향해 운다사람의 울음을 고라니가 우는 저녁몸속 울음들이 온통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수풀을 헤치고 개울을 지나울타리를 넘어 달려오는울음의 발톱이 너무도 선명해서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긴다배고파서 우는 소리라 하고새끼를 찾는 소리라고도 했다울음은 먼 곳까지 잘 들리는 환한 문장지붕에 부뚜막에 창고에 잠든슬픔의 정령이 일제히 깨어나는 저녁나는 안다 마당의 개도 목련도뚝 울음을 그치고달도 구름 뒤에 숨는 오늘 같은 날엔귀먹은 뒷집 노인도한쪽 손으로 울음을 틀어막고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이명윤, 〈고라니가 우는 저녁〉,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사람, 2024먼저, 이 시집에서는 울음의 원심력에 관한 시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시에서 울음은 존재의 독자적인 영역을 넘어 존재와 존재가 진정한 소통에 이르는 매개체가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에서 울음은 “몸속”을 “온통 애벌레처럼 꿈틀거”릴 만큼 존재 자체의 감각을 활성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수풀”, “개울”, “울타리”와 같은 경계를 넘어 다른 존재의 귀를 “너무도 선명”하게 할퀴는 “발톱”이 되기도 한다. 물론 시에서는 이 울음의 출처로 사슴과의 고라니를 지목하고 있으며, 그 울음의 목적은 배고픔이나 새끼를 찾기 위한 데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울음이 어떤 존재의 절실한 삶의 요구 그 자체라는 점에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울음은 먼 곳까지 잘 들리는 환한 문장”이라며 한 존재가 삶에 대해 느끼는 절박한 심정을 다른 존재에게 들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울음은 존재의 내부를 초과하여 그것이 여태까지 몰랐던 외부의 타자성에 가닿기 마련이다.   또한 울음은 모든 존재가 안고 있는 숙명과 같다. 물론 시에서는 표면적으로 고라니의 울음에 대해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마을의 집”을 이룬 “사람의 울음”을 아우르고 있다. 심지어 울음은 “마당의 개”, “목련”, “귀먹은 뒷집 노인”과 같이 인간, 자연, 짐승의 경계를 넘은 보편적인 범주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모든 존재의 울음이 활발하게 작동하기 시작하는 때가 “저녁”이다. 우리는 낮으로 표상되는 공적인 시간 동안 몸속 깊이 울음을 억눌러야 했던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저녁이 되면 이 내밀한 울음이 몸 바깥으로 새어 나오기 마련이어서 우리는 이른바 울음의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저녁은 낮 동안 은밀한 장소에 잠들어있던 “슬픔의 정령이 깨어나” 활동하는 시간이라 할 만하다. 다만, 이 가운데 고라니의 울음이 절실할 뿐이어서 시에서 다른 존재들은 “울음을 그치”거나 “한쪽 손으로 울음을 틀어막고” 있을 따름이다. 그건 그들이 고라니의 울음에서 어떤 절실함을 느낀 결과였겠지만 어찌 울음에 가치와 등급이 있겠는가. 그저 절실함을 가진 자가 다른 이의 절실함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울음이 삶에서 빚어내는 윤리성의 영역으로 접어든다.[울음의 유희와 연대성]모처럼 가벼워진 세상의 발들이구름 위를 걷고 있었고한 떼의 바람이 기병들처럼 키를 훌쩍 넘어풀숲으로 달려가고 있었다울음은 시야가 탁 트인 언덕에서서식하고 있었는데언덕에서는 울음도 마냥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온종일 뒹굴어도 아이들처럼 지치지 않는울음의 자세가 부러웠다뚝, 하면 금방 그칠 것 같은순하고 부드러운 줄기가 좋아사이를 비집고 가만히 억새로 서자순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울음은 출렁이는 긴 악보를 가지고 있었다누가 울음을 연주하는지 왜모두들 울음을 따라 우는지 몰라도 좋았다우는 사람 옆에 우는 사람,서로를 기댄 등이 따뜻해 보여 좋았다실컷 울고 나면 하늘은 맑아지고계절은 또 한 번 바뀔 것이다나는 울음을 타고 훨훨세상 밖으로 날아갔다울음은 얼굴 전체가 깃털이었다― 이명윤, 〈억새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사람, 2024다음으로, 이 시집에서는 울음의 유희에 관한 시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서 울음은 “억새들”로부터 비롯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시에서 “억새들”이 주어가 아니라 바로 “울음” 자체가 주어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모든 존재가 보편적이면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울음을 가지고 있는, 울음의 주체이기 때문이리라. 이때 문득 우리의 뇌리에 인간 존재를 “생각하는 갈대”라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그는 인간 존재가 물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 중 가장 연약한 대상에 불과하기에 이를 갈대에 비유하였다. 하지만 인간 존재는 오히려 자신의 유한성과 우주의 무한성을 인식하고 있기에 다른 어떤 존재보다 고귀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스칼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사유”에 두고서 공허하고 비참한 세계의 심연을 건너갈 다리를 마련한 셈이다. 이를 감안할 때 이 시의 독자적인 지점은 인간을 사유의 존재에서 울음의 존재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울음의 주체로 되돌려 놓으려 했다는 점에 있다.이 시에서 시인의 눈길은 “시야가 탁 트인 언덕에서/ 서식하고 있”는 “울음”을 향해 있다. 물론 우리가 조금만 더 그 현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울음은 마냥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실 이 울음은 각각의 “억새”가 펼쳐 보이는 주름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서 “억새들”이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형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때 바로 그 매개가 되는 것이 몸이다. 각각의 “억새”에게 몸은 울음의 유희가 펼쳐지는 장소이거니와 “억새들”에게 몸은 울음의 유희가 뒤섞이는 놀이터이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몸을 매개로 하여 울음의 공명과 울음의 연대를 탁월하게 이뤄낼 수 있다.이들에게 울음은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삶 자체의 목적에 가깝다. 그들에게 “누가 울음을 연주하는지” 또한 “왜/ 모두들 울음을 따라 우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울음 자체가 “마냥 즐거운 놀이”가 된 그들에게 울음은 창조적인 자세와 행위를 통해 지금-여기에 뿌리를 내리는 일종의 춤이기 때문이다. 혼자 추는 춤이기도 원무이기도 한. 그저 “우는 사람”과 “우는 사람”이 서로 등을 기대고 춤을 추다가 보면 어느 순간 “하늘은 맑아지고/ 계절은 또 한 번 바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하늘과 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는 내 눈이 성숙했다는 증거이지만 말이다.[다시 울음의 집을]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절실한 과업은 결국 울음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 “울음을 타고 훨훨/ 세상 밖으로 날아갈 만큼” 각자의 울음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때 세상은 우리에게 “울음은 얼굴 전체가 깃털이었다”는 가벼운 진실을 알려주겠지만, 이는 단순한 회의감이나 허무감을 넘어서 있다. 이 세상의 일로 울음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우리가 몸속에 울음을 위한 집을 짓는 일. 이것은 수동과 능동, 부정과 긍정을 넘어선 초연함의 경지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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