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공간이 오히려 인간을 만들기도 한다. 공간을 향한 인간의 각별한 지향성 때문이다. 그걸 우리가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말로 부른 지도 오래되었다. 중국 태생의 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이제 이 분야의 고전이 되어버린 《공간과 장소》에서 토포필리아를 설명하기 위한 두 개념을 끌어온다. 그것이 바로 공간과 장소이다. 이 개념들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경험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의미를 낳는다. 그에 따르면, 공간(space)은 물리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하며 우리가 주로 기술이나 지식에 의해 접근할 수 있다면, 장소(place)는 우리의 감각이나 경험에 의해 성립되며 기억과 시간과 결부되어 독특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자신에게 ‘애틋하고 친밀한’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관한 ‘애틋한 경험’을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서 나온 말을 장소가 오히려 인간을 만든다고, 아니 보다 엄밀하게는 장소가 오히려 인간 삶의 역사를 만든다고 바꿔 말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급격하게 자신의 장소를 어둠 속에 봉인해버리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럴 때 희미한 기억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장소와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아래의 시는 우리에게 각별한 울림을 가지고 다가온다.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나에게 돌을 던지던 여인도 죽고탑돌이 하던 푸른 옷자락의 여인도 죽고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도 죽었는데 나는여기서 너무 오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기찻길로 자꾸 몸이 기운다.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무언가 잊은 듯하다 그 아들의 아버지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어머니, 돌멩이 하나까지잊어버린 듯하다. 기찻길 너머 회나무아스팔트 한 가운데 살아남아해마다 금줄에 다시 묶여 어쩌지 못한다.그나 나나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이젠그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하다. 잊은 듯하다. ― 안상학, 〈오래된 사랑―임청고탑(臨淸古塔)〉, 《오래된 엽서》, 천년의시작, 2003 이 시에서 시인은 특정한 대상의 목소리를 빌려 ‘나’의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제목에 나타나 있다시피, 그 대상은 바로 안동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임청고탑이다. 임청고탑은 말 그대로 임청각과 고탑, 즉 법흥사지 칠층전탑을 가리킨다. 따라서 시인은 위의 시에서 법흥사지 칠층전탑의 목소리를 빌려 사라져가는 무언가를 향한 ‘오래된 사랑’을 노래하고자 한 셈이다. 그 사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걸 묻기 전에 우리는 법흥사지 칠층전탑의 근처에 있는 임청각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불과 재작년에도 잠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지만, 임청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를 보존한 곳이다. 일제는 이곳에 독립운동의 정기가 서려 있다고 판단해서인지 그 앞에 철로를 놓고 옹벽을 쳐서 이곳을 가려버렸다. 다행히도 재작년부터 철로와 옹벽을 제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지금은 이곳이 당당한 자태로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법흥사지 칠층전탑 또한 임청각의 덕을 봤다고 해야할까. 그러니까 우리는 위의 시에 나오는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그 앞의 철로와 옹벽이 제거되기 전의 모습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시를 읽어나가야 한다.     이 시에서 가장 먼저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나’의 목소리를 의탁하고 있는 법흥사지 칠층전탑이 일종의 경계에 서 있는 점일 것이다. 굳이 그 경계의 좌표를 설정한다면, 하나는 과거의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나’의 눈은 그동안 자신이 이 자리에 서서 걸어온 시간을 헤아리고 있다.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세워진 고탑이라고 한다면, 그 시간은 너무나도 아득하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세대의 손길과 옷자락이 스쳐갔을까.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축이라 할 수 있다. ‘나’의 눈은 옹벽 너머 철로로 향하면서 이곳과 다른 시간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몸은 자꾸만 기찻길을 향해 기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때 과거와 현재가 부딪히면서 그 누구도 어찌하지 못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경계에 선 ‘나’의 눈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력한 일이겠는가. 그리고 과거로부터 현재로 향한다면 그건 얼마나 간절한 일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는 말 그대로 경계에 서서 양쪽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가 시의 마지막 행에서 ‘잊어버린 듯하다.’와 ‘잊은 듯하다.’를 연달아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자를 우리가 예술주의라고 할 때, 이 시에서 그가 말하는 ‘잊어버린 것’을 예술주의의 시선이 빚어낸 것이라 할 만이다. 예술이란 어떤 면에서 잊어버린 것을 향한 향수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후자를 우리가 현실주의라고 부른다면, 이 시에서 그가 말하는 ‘잊은 것’을 현실주의의 시선이 빚어낸 것이라 할 만하다. 현실이란 결국 잊은 것 위에 새로움을 구축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그는 바로 예술주의와 현실주의의 가교를 잇고 있으며, 그걸 우리는 인문주의의 시선이라 부르면 어떨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흔히 망각으로 둘러쳐진 장소를 변두리라고 부른다. 그건 철저하게 중심과 주변의 권력관계에 의해 밀려난 것이어서 가난과 소외라는 의미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것보다 오히려 장소는 내밀하면서 또 명랑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인문주의의 시선으로 바라볼 장소는 비로소 ‘언저리’에 가깝다. 우리의 생활과 의식 어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 앞으로 이 글은 언저리에 바쳐진 인문과 예술의 이야기를 더듬어갈 것이다.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