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와 결핵 환자 치료 등 울릉도 주민들을 위해 젊음을 바친 ‘한국의 슈바이처 이일선 목사’를 아시나요!”1961년 울릉도로 들어가 18년간 울릉도 주민들을 위해 헌신한 의사이자 목회자요, 농촌 계몽 운동가였던 고(故) 이일선 목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재평가는 먼저 이 목사가 시무했던 서울 신일교회에서 시작되고 있다. 지난해 이 교회 배요한 담임목사가 이 목사의 울릉도에서의 의료활동 등 생애를 기록한 ‘등에는 십자가, 입에는 노래’라는 제목의 전기를 펴냈다.     이어 이 목사가 울릉주민들을 위해 치료와 계몽 활동에 전념했던 병원과 집터 등을 찾아 선양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도 찾고 있다. 또 그의 숭고한 삶이 울릉 주민들에게도 새롭게 조명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최근 신일교회 배요한 목사 등 일행과 함께 이 목사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울릉도를 방문, 동행 취재했다. 취재 기록을 3회로 나눠 싣는다. ▶이일선 목사가 울릉도로 가게 된 까닭은?1922년 전북 익산에서 가난한 농부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 슈바이처 박사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슈바이처 박사를 그의 삶의 좌표로 삼기로 결심했다.         ` 입구에서 촬영한 이일선 목사의 모습(1960년대 초) 1955년 서울대 의대 피부과를 졸업한 그는 1956년 한국 최초의 나병에 관한 책인 ‘나병의 현대적 개념’을 번역했다. 그해 겨울에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평생을 나병환자 치료에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다미앵 신부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또 소록도와 원주 나환자 수용소를 정기 방문하는가 하면 ‘나병 이동 진료반’을 만들어 전국의 나환자들을 찾아다녔다. 드디어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할 기회가 왔다.   슈바이처 박사에게 함께 나환자 치료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했고, 1958년 11월 와서 함께 봉사할 수 있다는 편지가 받았다. 결국 그는 아프리카 가봉으로 날아가 랑바레네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3개월간 나병 환자를 치료한 뒤 귀국한다.   그가 아프리카 오지로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간 것은 당시 나환자와 결핵 환자가 많은 울릉도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굳히기 위해서였다.왜냐하면 그가 아프리카로 가기 수개월 전인 1958년 3월 용마호에 밀가루와 옷가지 등 구호 물품을 싣고 울릉도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울릉도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난 용마호가 며칠간 표류하는 바람에 이 목사 일행은 구사일생 울릉도에 도착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시무하던 서울 신일교회 목사직을 벗어던지고 1961년 5월 22일 부인 오길화 여사와 어린 자녀(2남1녀)를 데리고 울릉도로 의료와 사역과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당시 한 언론은 이 목사의 울릉도행(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고 오기 전부터 ‘슈’ 박사의 길을 흠모해 온 그는 드디어 정든 서울(그가 말하는 죄악의 도성)을 떠나 문명을 등진 동굴 속에서 신음하는 울릉도의 동포들에게 감추었던 빛을 전하려고 어엿이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를 아는 수많은 지성인들은 한결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다음 순간 ‘그이기에 내릴 수 있는 용단’이라고 장도를 축복하는 표정이었다.”(‘울릉도에 개화의 사도’, 경향신문. 1961.5.10. 3면 중)   이와 함께 이 목사는 자신이 울릉도를 선택하게 된 결심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제가 울릉도를 나의 사업지로 선택하게 된 것은 울릉도는 한국의 한 축소판인데 도민들은 자활의 길이 없이 가난과 질병 속에 허덕이고 정식 교육받은 의사도 없고 결핵, 문둥병, 기생충 등으로 도민의 건강이 위협을 당하고 있고 도민들은 희망이 없는 상태로 한탄 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울릉도통신’, 기독공보2면, 다카하시5. 1961)     그가 울릉도를 선택한 것은 나환자 치료와 사역 목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 사회격변기를 지켜보면서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신념도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그는 울릉도로 떠나기 며칠 전 그를 환송해 주는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말로만 애국애족하고 머리만 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발로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고 말했던 것이다.(‘신일교회 60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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