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은 이제 정말 옛말이 되어버렸다. 현대사회는 그 말에 담긴 세월의 무게를 단숨에 폐기하듯 놀라운 속도로 인간의 감각과 인지능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매일 복잡다단한 상황에 내몰리고, 머잖아 발등에 떨어질 미래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제출하는 다종다양한 개념은 그 자체로 명쾌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이는 현대사회를 단일한 개념으로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우리가 그간 개념의 홍수를 헤엄치면서 터득한 경험의 진실은 다음과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현대사회는 가공할 만한 사회문제들이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는 곳이라는 점, 그리고 이성과 비이성, 합리성과 비합리성과 같은 양극성이 하나의 얼굴로 수렴되는 곳이라는 점. 그러면서도 우리는 간혹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개념 중에서 세월의 흐름을 무색하게 하는 탁월한 사유의 결정체와 마주할 수 있다. 바로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 1944~2015)이 제출한 ‘위험사회’라는 개념이 그렇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이를 표제로 삼은 기념비적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서늘한 말을 남긴 바 있다. 하나의 공식을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즉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근대화 위험의 확장에 따라, 즉 자연, 건강, 영양 등의 위험의 확장에 따라 사회적 차이와 한계는 상대화된다. 대단히 상이한 결과들이 이로부터 계속해서 도출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위험은 그 범위 내부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평등화 효과를 보여준다. 위험이 새로운 정치력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히 그 같은 효과 안에서이다. ― 울리히 벡, 홍성태 옮김,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새물결, 2019 울리히 벡의 사유는 근대화의 돌출적인 지점을 더듬어 가면서 근대성 자체에 내장된 근본적인 한계점을 겨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서막을 장식한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라는 기적을 안겨주었고 부의 분배에 따른 계급사회로 우리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앞세워 근대성을 세속적인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울리히 벡은 우리가 산업화의 박차를 가해 부의 생산을 증대해감과 동시에 위험의 생산을 동반해 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그가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며 힘주어 제시한 공식은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의 실상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다수에게 불평등했던 산업사회가 아니라 모두에게 평등한 위험사회에 처해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문득 울리히 벡의 개념을 되새기고자 했던 것은 아직 대구 시민들의 가슴에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는 사건에서 연유하였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났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이다. 이날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는 아침 9시 50분경 평온한 일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화재가 발생했다. 애초 불은 평소 자신의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한 한 중년 남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삽시간에 지하철 전체로 번졌고, 그리고 역 건물 전체를 검은 연기로 집어삼킬 만큼 무서운 규모로 돌변했다. 당시 192명의 무고한 이들이 한순간 끔찍한 지옥으로 탈바꿈한 곳에서 신음하다가 생사를 달리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차가운 개념의 메스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사후적으로 이 사건이 우리에게 위험사회에 관한 일종의 경각심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는, 한 중년 남성이 자기 삶에서 오는 비관을 사회 전체로 돌린 데서 이 사건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이제 위험은 재해와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초래하게 될지 모르는 잠재적 위협을 가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화재 당시 기관사의 대처를 비롯하여 지하철 관리·감독자들의 대처가 이 사건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 간 데서 알 수 있듯이, 위험은 평소 견고하게 은폐된 사회적 시스템을 붕괴시키면서 출현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사회학적 견지에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을 파헤치기 위한 여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보다 화재 당시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려 살았고, 얼마 뒤 풍문으로 들었던 화재 현장을 직접 둘러본 사람으로서, 그때의 참담한 심정과 마주하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이때 아래의 시는 우리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의 내부로 들어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다. 칸이 여럿 달린 긴 죽음이 지나갔다.그쪽으로 가던 숱한 볼일들이 어디론가 급히 실려가버리고, 없다.조금 전 분명 잘 만져졌던 마음,왜 저기 기억 속에 박혔나, 화살처럼 부르르 떠나.악수하고 힘껏 껴안을 수 있는, 한대 쥐어박으며 오해를 풀 수 있는, 장난치며 간질일 수 있는 몸, 정신차리고 보니 없다. 사방엄청 큰 허공이다. 지금 가장 생생하게 피어오르는얼굴,꽃진 자리처럼없다.없다는 사실! 이 시꺼먼 창고는 비명으로 꽉 찼다.사람들은 줄지어 불탄 지하철 내부 대리석 기둥이며 벽면에, 기껏 그을음일 뿐인 화마(火魔) 위에 깜깜한 자필로 문질러 쓴다.인생이란 미처, 그리고 마저 사랑하지 못한 내용일까.“보고 싶다”고, “우리 꼭 다시 만나자”고……쓴다.흰 국화, 징검다리 더 길게 놓으며 간다. ― 문인수, 〈없다〉, 《배꼽》, 창비, 2008 사실 우리는 이 시에서 제목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등장하는 “없다”라는 말을 단순한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시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심리적 진술이라고 봐야 한다. 처음부터 시의 화자는 “칸이 여럿 달린 긴 죽음이 지나갔다”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분명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현장에서 “죽음”이라는 또렷한 사물을 마주하고서 전신을 관통하는 극심한 충격에 휩싸여 있다. 이 순간 그를 사과에, 그리고 그를 덮친 충격을 과도에 빗댈 수 있다면, 이때 그는 신이 단숨에 내리치는 칼날로 인해 반토막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의식은 이쪽과 저쪽 사이에 놓인 “사방/ 엄청 큰 허공”을 왕래하며 고통스러운 희망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그의 의식의 추는 이쪽의 현재와 저쪽의 과거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고 있다. 지금 그는 “꽃진 자리처럼” 소멸의 흔적을 통해 누군가 존재했던 풍경을 내다보고 있다. 그들은 바로 전까지만 해도 “그쪽으로 가던 숱한 볼일들”을 붙잡고 있었고, “조금 전 분명 잘 만져졌던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는 ‘있었음’의 과거형으로 “저기 기억 속에 박”혀 “화살처럼 부르르” 떨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그가 “지금 가장 생생하게 피어오르는/ 얼굴”을 호명하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없다” 속에 미약하나마 ‘있었음’을 보존하려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두 번째, 그의 의식의 추는 이쪽의 절망과 저쪽의 희망 사이를 끈질기게 오가고 있다. 그는 지금 시커멓게 타버린 지하철 잔해에서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비명으로 꽉” 찬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그의 눈앞에서 “불탄 지하철 내부 대리석 기둥이며 벽면”, 그리고 “기껏 그을음일 뿐인 화마(火魔)” 따위는 그들이 결국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저쪽에 “악수하고 힘껏 껴안을 수 있는, 한대 쥐어박으며 오해를 풀 수 있는, 장난치며 간질일 수 있는 몸”이 부디 있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소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의 눈길은 그을린 벽면에 누군가 남긴 “보고 싶다”라거나 “우리 꼭 다시 만나자”라는 글귀에 가닿고 있는 건 아닐까.   시에서 부재의 형식이란 결국 살아남은 자가 이쪽의 현재와 저쪽의 과거 사이를, 이쪽의 절망과 저쪽의 희망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애도의 작업이다. 우리는 아직도 “흰 국화”를 통해 “징검다리 더 길게 놓으며” 걸어가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앞서 살펴본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 기초이자 원동력인 규범은 안전(safety)이다.”라고 말한 부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사건과 접속해본다면, 우리가 언젠가부터 강박관념처럼 부르짖는 안전은 그 누군가 잠들지 못한 무덤일지도 모르겠다. 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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