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우리가 이 사회에서 불거지는 부조리함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 종종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극적인 사회 변혁의 계기를 혁명에서 찾는 데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 혁명이 역사적인 사태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를 치열한 정신으로 살아간 시인 김수영(1921~1968)이다. 그는 혁명이 현실의 필연적인 결과로 귀결되는 순간 낡은 역사로 고착화되어 버린다는 것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그보다 그에게 혁명은 기존의 현실에서 보자면 전혀 예기치 못한 우발성을 지니거니와 단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흐름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낙후된 현재에 미래의 호흡을 불어넣으려는 이에게 혁명은 눈앞에 완벽한 형태로 드러나는 현실성이 아니라 불분명한 무정형과 유동성을 드러내는 잠재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혁명에 대한 이러한 김수영의 생각은 1960년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단숨에 뒤바꾼 4·19혁명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아니, 당시 숱한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이념을 획득한 4·19혁명은 김수영이 혁명의 본질을 명확하게 자각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따름이다. 오히려 그는 4·19혁명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삶 자체를 사건으로 만드는 작업을 나날이 진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 시에서 진정한 혁명가로서 김수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내가 살기 위하여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나의 원천과 더불어나의 최종점은 긍지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가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이것이 나의 날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김수영, 〈긍지의 날〉,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2018 이 시에서 김수영은 혁명의 궁극적인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결국 이 사회를 구성하고 움직여가는 것은 사람이기에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사람이 바뀌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거나 바꾸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면, 그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바뀌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아닌가. 그래서 혁명은 지금-여기의 현실에 나의 몸을 뿌리내리는 행위의 실천이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나의 몸에서 파생하는 생명을 전달하는 감염의 실천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일상생활의 공간에서 그러한 혁명을 실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건 바로 일상생활 자체가 정해진 루틴에 따라 이루어지기 마련이어서 우리가 그 진부함과 상투성에 숨어서 살아가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활인으로서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기분이란 통상 삶의 무게를 동반하는 피로와 같은 것이다. 이 피로는 우리가 그저 외부 환경에 압도되어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지점에서 김수영은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우리에게도)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면서 자기 혁명의 주체로 서기를 주문한다. “너무나 잘 아는/ 순환의 원리”가 작동하는 일상에서 피로가 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피로를 만드는 주체라고, 그리고 그 피로는 “내가 자라는 날”의 발판이 되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김수영에게 혁명의 날은 “긍지의 날”이며 결국 “내가 자라는 날”에 다름 아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내가 자라는 날”의 “나의 몸”을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에 빗대고 있다. 이는 바로 그가 “순환의 원리”을 매개로 하여 혁명의 날을 인간의 시간이 아닌 자연의 시간에 접속하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렇게 하고자 했는가. 그건 “꽃”이 자연의 질서에 의해 어김없이 정해진 계절과 때에 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건 똑같은 꽃이면서 매년 다른 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마찬가지로 “나의 몸”이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되는 것은 어제의 나와는 다른 오늘의 내가 된다는 것을, 매 순간 자기 자신을 갱신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그에게 “꽃”은 혁명의 전리품이라기보다 일상생활을 사건의 무대로 만드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역량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김수영식의 혁명에 대해 던져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어떻게 삶 자체를 변혁할 수 있는가?’라고. 이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는 평소 김수영이 가슴에 품고 살았던 좌우명에서 얻을 수 있다. 그의 좌우명은 “상주사심(常住死心)”으로,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때의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모든 생명체의 필연적인 종착점을 가리키는 것이겠지만, 애초 우리가 삶에서 죽음을 직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이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보다 상징적 죽음에 가깝다. 내가 삶 속에서 혁명의 주체로 선다는 것은 기존의 낡은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탄생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을 향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김수영은 인간 존재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을 죽음에서 찾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를 진정 사랑했던 모양이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이제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열렬하다간단(間斷)도 사랑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신념이여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신념보다도 더 큰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너는 개미이냐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인류의 종언의 날에너의 술을 더 마시고 난 날에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 거다!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거다!그리고 그것은 아버지와 같은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전집 1》, 민음사, 2018 이 시에서 김수영은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랑의 지속적인 실현에 있다는 것을 지극히 아름답고 강렬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는 왜 일면 먼 지점에 놓여있는 혁명과 사랑을 연결하고 있을까. 그것은 대상에 관한 지향성, 즉 사랑의 시선을 가진 자에게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모든 대상이 고정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놓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그가 주변으로 눈을 돌리자마자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에서부터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 강 건너에 있는 “암흑”,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틔운 “봉오리”, 저쪽에 있는 “쪽빛/ 산”, “가시밭, 넝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상이 자신을 벅차게 하는 사랑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혁명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삶의 사건인 셈이다. 이때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김수영이 일상생활의 공간을 혁명의 무대로 발견하게 된 원동력에 관한 부분이다. 서두에서 그가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라고 천명하고 있듯이, 그것은 사랑의 원천으로서 “욕망”이다. 사실 인간이야말로 적든 많든 누구나 욕망의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자는 의식주를 요구하고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는 일시적으로 충족되는 것이어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육체적인 요구를 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욕구에서 요구를 뺀 나머지를 욕망이라 불렀고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규정한 바 있다. 그렇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결핍을 채우려고 발버둥 치는 존재이기에 이 결핍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김수영이 당시 “4‧19에서 배운 기술”로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제시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그에게는 결국 눈앞에 나타난 4‧19혁명의 결과보다 4‧19혁명을 촉발한 원동력 자체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이 바로 일시적이나마 당시 한국 사회에 민주주의의 분위기를 불어넣은 사람들의 욕망이었고, 그로 인해 사회를 바꿔보려는 사랑의 실현이었다. 그러니 4‧19혁명이 김수영에게 안겨준 깨달음이란 혁명의 현실성보다 그것을 파생한 혁명의 잠재성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그러나”라고 발언하고 있지만) 그는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고, 즉 혁명의 잠재성으로서 욕망을 자각한 이상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을 만드는 기술”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그는 우리가 혁명의 잠재성으로서 욕망을 공통성으로 하여 각자의 삶의 공간에서 자기 혁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이때 우리에게 욕망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는 “씨”와 같은 것이지만, 우리는 “복사씨”, “살구씨”, “곶감씨” 등 각자의 고유함을 다채롭게 펼쳐내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진정 “봄베이”, “뉴욕”, “서울” 등과 같은 거대 도시에 비해 위대한 사랑의 도시의 일원이 될 터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작업으로 김수영은 우리가 욕망과 욕망의 접속을 통해 “인류의 종언의 날”과 같은 먼 미래에까지 혁명을 계승해가기를 주문하고 있다. 그러니 김수영은 다음 세대인 “아들”을 향해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도시의 피로”를 통해 자기 혁명의 주체가 되고 뜨거운 사랑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다가 언젠가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김수영식의 혁명은 결코 유효기간이 없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