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선이 끝나고 맞는 첫 주말, 많은 사람들이 `대선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이번 대선이 유독 길고 급박하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12.3 계엄 내란 사태`의 긴장 이래로, 양 진영 지지자들 사이에 수차례 집회와 폭동이 맞붙었고, 험난한 탄핵심판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특히 계엄 이후 전국적으로 17차례나 이뤄진 탄핵집회에는 누적 천만명에 달하는 국민들이 매주 참여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중에서도 한 참가자가 들어올린 소위 `걸어다니는 대자보` 피켓이 화제가 됐다.
대자보의 내용은 SNS에서 수백만회의 조회를 기록하며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국내 대다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수차례씩 `인기 게시글`로 등록되며 회자되었다.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에서 스스로를 `TK의 딸`이라 부르는 젊은 여성이 `탄핵과 개혁`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인 `소결(가명)씨`를 직접 만나봤다.
짐짓 일반인을 가장한 정치 지망생의 `작전`은 아닐까 우려했던 마음도 잠시, 만난 그녀는 20대 사무직 직장인으로 여느 사회초년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한 명의 시민이었다.
- 피켓 대자보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파급력을 알게 된 후에 어떤 마음이었나?
"처음에 드는 감상은 되게 고마웠어요. 처음엔 대구경북 시민들이 먼저 호응을 해주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의 딸이 연대합니다, 강원의 딸이 연대합니다, 경기의 딸이 연대합니다, PK의 딸이 연대합니다...` 제주랑 서울, 충청 시민들까지 응원을 주시게 되었거든요. 그게 너무 고마웠어요. 온라인에서는 타지역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현장에서는 대구 사람들이 안아주고 울어줘서 또 큰 감동을 받았죠."
-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 한 복판에서 여성 혼자의 힘으로 탄핵과 민주주의를 외치기 쉽지 않았을텐데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 피켓을 들고 혼자 거리에 서 있을 때의 압박감은 엄청 났어요. 나중에는 `대경파란` 단체 회원 분들이 함께 해주시긴 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버스정류장에 혼자 서 있을 때면 문득 무서운 마음도 들기도 했죠."
그러나 그녀에게 진정 두려운 것은 물리적인 위협이나 방해가 아닌 `대구경북 사람들의 무관심`이었다.
"적대적이기 보단 오히려 무관심한 그 눈빛들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마치 남의 일 보는 듯한 냉소적인 모습들.. `과연 바뀔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걱정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소결씨는 즐겁고 감동적인 기억이 더 많았다고 했다.
"피켓을 들고 집회에 나가 맨 뒷줄에 서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보면서 환호해주셨던 기억이랑... 저를 보면서 안아주시고 응원해주셔서 울컥했던 경험이 있었어요. 한강진에 피켓을 들고 나갔더니 누군가 대뜸 다가와서 `저는 강남의 딸`이라고... 고생많으시다면서 안아줬던 경험도 있고, 인터넷에서 피켓 내용을 보고 따라서 집회에 나왔다는 분도 계셔서 그때 또 울컥했었죠."
- 평범한 20대 청년에게 처음으로 생소한 글을 게워내게 하고, 추운 겨울날 피켓을 들고 거리 한 복판에 서 있게 했던, `12.3 계엄·내란 사태`
계엄 사태에 놀란 마음도 잠시, 뉴스를 보던 소결씨는 분노가 치밀었다.
"추경호를 비롯한 국민의힘 국회의원들, 그 중에서도 23명의 TK 지역구 의원들에게 너무나 화가 났었죠. 국회가 아닌 당사에 모여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걸 전 국민이 다 봤는데도 `국회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표결이 다 끝난 후였다`라며 뻔뻔하게도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손이 떨릴만큼 화가 났어요. 국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알면 저럴까.. 무슨 짓을 저질러도 TK 지역에서 공천만 받으면 다시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너무 오만해 보였어요."
- 두 번째 피켓의 서두도 인상적이다. `대구 서문시장`은 수구세력의 정치적 상징이다. 대기업과 대형마트의 재래시장 침투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현수막 아래에서, 그런 대기업에 가장 힘을 실어주는 수구 정치인을 제일 반겨주는 가장 모순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첫번째 피켓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응원하는 말들이 대다수였지만, 그래도 저런 사람은 소수다, 대구경북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라는 반응도 많았죠. 그래서 함께 싸우는 동지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지치지 말고 더 견디자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멈추지 말고 힘내자고 함께 위로하고 싶었죠."
- 세 번째 피켓은 짐짓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서부지법 폭동이 페미니즘 혐오와 어떤 관련이 있나?
"서로가 생각이 다르니 부당한 사건이라 느끼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자신의 자의적 기준에 벗어났다고 해서 무작정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무도한 짓이죠. 혐오 범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묵인하고 면죄부를 줘왔던 우리 사법부의 과거가, 결국 법원 자신에게로 향하는 폭력을 불러 일으킨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부지법 폭동`은 현직 대통령으로서 헌정 사상 최초로 체포된 윤석열에 대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영장실질심사가 이뤄진 서울서부지방법원 주변에서 불법 시위를 벌이던 수백여명의 윤석열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고 파괴하며 경찰과 민간인, 기자를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휘두른 폭동 사태였다. 소결씨의 눈에는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는 혐오와 폭력이,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미온적 대처가, 국가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 연장선상으로 보였다.
- 매 선거 때마다 서울과 수도권, 충청, 호남, 제주 사람들이 대구경북 사람들 전체를 호도하는 일이 반복된다. 하지만 대구경북에도 `개혁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의 무도한 행위가 반복될 때마다 분노한 여론으로 인해 대구경북을 싸잡아 `답이 없다`며 탓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빠질 때가 있었죠. 마침 대구를 방문한 (당시) 이재명 대표님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민주주의의 황무지 같은 곳이지만, 이 땅에도 엄연히 민주시민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 `대구경북을 잊지 말아달라`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 가장 화제가 되었던 마지막 피켓의 내용 역시 인상적이다. 요즘 시대의 사람들에게 `시스템`에 대한 `저항`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단어다.
아파트 층간 소음이 문제일 때 건설사에게 따지지 못하고, 이웃끼리 다투고 살인까지 벌인다. 스펙이 부족해 취업이 안 될 때 공정한 교육 시스템을 요구하지 못하고, 부모를 원망하거나 친구를 시샘한다. 무엇이 계기가 되어 이런 글을 쓰게 되었나?
"세월호 참사였어요. 사고를 당했던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나이였거든요. 저도 수학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런 사고가 났었죠. 그때는 마냥 놀랍고 슬프기만 했었는데, 대학에 들어가 사회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구조`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저 단순히 안타까운 사건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참사가 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 묻기 시작했죠."
대구경북 지역에서 살아 온 부모님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 보여준 박근혜의 무능력과 무책임은, 소결씨가 좀 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하는, 물질적이고 냉소적인 세대`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외로울거라 생각했던 그곳에는, `응원봉`을 잡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탄핵 집회의 세대 교체를 이뤄낸, 그녀와 같은 동지들이 있었다.
"지금 이 시대가, 돈이 되지 않는 가치는 전부 쓸모 없다고 판단하는 시대 같아요. 하지만 계엄이라는 사태 앞에서 가족과 나의 안전, 그리고 민주주의의 자유란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가치였죠. 그걸 지키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진정 옳은 일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저항입니다."
- 결국 대선은 민주당의 승리로 끝났다. 지난 반년간의 피켓 시위 기간 동안 소회가 어땠나?
"처음 피켓을 들었을 무렵에는 편의점 알바생이었거든요. 피켓 내용이 많이 알려지면서 마치 스타라도 된 기분도 들었지만, 그러다 집회가 끝나고 아르바이트 자리로 돌아가 무례하게 함부로 대하는 손님을 다시 대할 때면 기분이 참 이상했어요. 우리가 선거 때마다 25퍼센트 정도는 늘 같은 편이 있다는 걸 확인하지만, 그 사람들이 대체 어디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살아 가잖아요. 일단 이 지역에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저와 정치적 성향이 반대니까.. 이렇게 서로 흩어져 고립된 상태로 살아오다가 `TK의 딸`이 되어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연결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더욱 모여서 힘을 합쳐야 외롭지도 않고 더 큰 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고 지역주의적인 이 대구경북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민주주의적 소신을 밝힐 수 있는, 더 많은 `TK의 딸`이 나타나길 바랐다. 그래서 혼자지만 `TK의 딸들`이라 복수형으로 자신을 칭했다.
"TK의 아들들도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정말로요. 더 이상의 혐오도, 갈등도 없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주류가 된 대한민국이 되길 바랍니다."
대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란 사태의 주범들 중 아직 그 어떤 누구도 제대로 된 수사도, 처벌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란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힘들지만 조금 더 힘을 모으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소결씨의 말을 빌린다.
"견디는건 우리의 특기이자 전문이 아니더냐...
모든게 막막하게 느껴지면 새해의 일출을 보라.
한달후, 내년, 내후년, 한해의 먼 동이 틀 때마다 우리보다 진보한 우리의 동생들이 투표장에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