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1907-1942)과 한흑구(1909-1979)는 1937년 전후로 평양에서 자주 만났다. 그때 소설가 이효석은 숭실대 영문학과 교수, 한흑구는 미국 유학 5년 후 귀향해 월간지 <백광>을 주재하는 시인ㆍ소설가ㆍ수필가ㆍ번역가로서 양주동, 이효석 등과 문학좌담도 열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은 평창 메밀밭에 세운 `이효석문학관`을 중심으로 수많은 방문객과 더불어 면면히 기억되고 있건만, <단 한 편(片)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은 영광된 작가>로서 일제강점기 민족문학 명예의 전당과 같은 기록에도 오른 한흑구는 포항 호미곶 한켠의 오두막 같은 공간에 쓸쓸히 존재하고 있다.<메밀꽃 필 무렵>은 단편소설이고 <보리>는 수필이니 서로의 우월을 가리는 일이 애당초 불가한 것처럼 문학적 가치와 시대적 위상의 우월을 가리는 것도 불가한 일이다. 우리가 잊고 살아도 그만큼 <보리>는 귀중하고 보배로운 작품이라는 뜻이다. 지난 몇 년간 한흑구문학연구의 성과물이 축적되고 유고수필집 <뻐저리 아저씨>도 출간되어 `한흑구문학관` 건립의 한국문학사적 당위성은 더욱 분명해졌다.한국 수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한흑구의 <보리>는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1950년대 대한민국의 보릿고개를 헤아려야만 진미를 이해할 수 있다. 1955년 4일 28일 동아일보에 처음 게재된 <보리>. 보릿고개를 간신히 넘긴 이 땅의 민초들에게 생명줄과 같은 구휼 식량으로 거듭날 보리에게 한흑구는 극진의 찬미를 바쳤다.`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비명을 다 바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그랬다. 저 쓰라리게 궁핍했던 보릿고개 시대, 그때 오뉴월에 타작한 보리는 굶주림을 메워주는 성자(聖者)와 다르지 않았다. 석가모니, 예수, 공자의 말씀인들 굶주려 쓰러질 사람에게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1990년대에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감당하던 북녘 동포에게 수령님의 교시든 장군님의 교시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겠는가.한국전쟁 때 완전히 파괴된 포항 시가지 복구사업에 미군의 힘을 끌어오기도 했던 미군정청 고위 통역관 출신의 한흑구는 <보리>를 쓰기 위해 전후(戰後) 어느 날에는 호미곶 구만리의 드넓은 보리밭을 답사한 적도 있었다.한흑구문학관 건립의 최적 장소는 호미곶 구만리 보리밭이다. 거기 곁에서 수제 흑생맥주 <흑구> 또는 <검은갈매기>도 제조해 판매한다면 한국문단 최고 주당급이었던 선생이 별안간 "나도 한 잔 주라우" 하며 나타나시려나. 문제는 접근성이다.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호미곶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이 오히려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겠으되, 자동차 없이 찾아온 사람들은 시내버스에 의존해야 하니 멀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대안은 있다. 포항 북구의 어느 지점부터 영일만을 가로질러 호미곶 어느 지점까지 왕복하는 바닷길을 잘 만들어 여객선을 띄우면 거뜬히 해결될 뿐만 아니라, 이는 더 나아가 포항의 새로운 관광명품으로 떠오를 것이다.한흑구의 <보리>는 늦가을 파종부터 여름의 추수까지 보리의 사계(四季)를 한 편의 탁월한 서정시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철마다 보리와 관련한 멋진 문화행사도 기획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 그 많았던 노고지리(종달새)가 봄날의 푸른 보리밭으로 부활해온다면 이 지상에 그렇게 좋은 날도 좀처럼 없으련만!물론 한흑구의 <보리>가 노고지리를 놓쳤을 리 만무하다. 푸른 보리밭에 숨겨놓은 그 비밀의 둥지까지도.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이 새날과 함께 빛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대고, 또한 너의 깊고 아늑한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봄날 보리밭 위 낮은 허공에 솔방울처럼 점점이 박혀 노골노골 우짖던 노고지리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나의 조그만 손가락에는 앙증맞은 둥지 속 노고지리 알들을 살며시 집어냈을 때의 그 포근한 떨림이 여전히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