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홉 없이는 좋은 맥주도 없습니다.”   포항 흥해읍의 한 밭에서 만난 김진동 대표(에이홉, A-HOP)는 햇빛에 그을린 손으로 홉 송이를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지난 몇 해 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얻은 확신이었다.그는 처음부터 농부가 아니었다. 한때 전국을 푸드트럭으로 돌며 맥주와 안주를 팔았고, 이후 ‘필리스 펍’을 운영하며 맥주의 맛과 향을 공부했다. “손님들이 ‘이 향이 뭐냐’고 묻는데, 정작 저도 몰랐습니다. 그게 홉이었어요.” 그는 그날의 호기심이 오늘의 시작이 됐다고 회상했다.■ “수입 원료에만 의존하는 현실이 답답했죠”한국 수제맥주 시장에서 홉(hop)은 전량 수입에 의존해왔다. 미국·독일·호주 등에서 들여오는 홉은 운송비와 냉장 보관비가 비싸고, 품질도 물류 과정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김 대표는 그 현실이 답답했다고 말한다.“홉을 재배해보자는 생각을 처음 했을 때, 다들 ‘그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름에 습하고 장마가 길어서 곰팡이가 생기니까요. 하지만 포항의 바람과 햇살은 오히려 홉이 자라기 좋은 조건이었습니다.”그는 전국을 돌며 여러 재배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 흥해읍 일대에 작은 시험포를 조성했다. 문제는 첫해였다. “줄기를 세우는 철선부터 잘못 걸었죠. 바람이 세서 쓰러지고, 해충이 달려들었어요. 하지만 실패한 이유를 다 기록했습니다.” 그는 농업이 아니라 실험실에 가까운 노트를 꺼내 보이며 웃었다.   ■ “홉은 농작물이 아니라 기술이에요” 홉은 단순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면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 품종에 따라 알파산(쓴맛을 내는 핵심 성분)의 함량이 달라지고, 수확 후 24시간 안에 건조하지 않으면 향 성분이 급격히 손실된다. 김 대표는 말한다.   “홉은 농업이 아니라 기술이에요. 재배에서 건조, 저장, 추출까지 모든 과정이 연결돼야 합니다. 단순히 키우는 게 아니라, 향을 ‘보존’하는 겁니다.” 그는 이 기술을 농업에서 산업으로 확장하려 한다. 포항의 기후 데이터, 토양 분석, 일조량 변화를 기록하며 매년 품종을 조정하고 있다.    “한 해는 아로마 향이 강한 ‘카스케이드’, 다른 해는 쓴맛 중심의 ‘센테니얼’을 시험합니다. 그리고 포항 기후에 맞는 최적 조합을 찾는 거죠.”   ■ “좋은 맥주는 결국 지역에서 태어납니다”김진동 대표의 목표는 단순히 홉을 키우는 게 아니다. 그는 이광근 대표(포항수제맥주)와의 협업을 언급하며 “좋은 맥주는 결국 지역에서 태어난다”고 강조했다.   “이광근 대표님이 맥주의 90%를 이미 포항산으로 만들고 있었어요. 쌀, 과일, 물까지 다 포항산인데 홉만 수입이었죠. 제가 그 마지막 한 칸을 채워보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김 대표가 포항에서 재배한 홉 일부가 실제로 포항수제맥주의 시제품에 사용된 것이다.    “비율은 아직 적지만, 향의 변화가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수입산보다 거칠지만 생동감 있는 향이었어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포항 홉의 가능성, 그리고 다음 단계현재 국내에서 상업적으로 홉을 재배하는 곳은 강원 홍천, 경북 의성, 전북 부안, 그리고 포항까지 넷뿐이다. 포항은 해풍과 일조량이 풍부해 ‘시트러스 계열’ 홉 품종에 특히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대표는 올해부터 초임계 이산화탄소 추출 기술을 도입해 홉 오일을 추출, 맥주뿐 아니라 식품·화장품 원료로 확장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홉 향 오일은 항산화, 항염 성분이 있어요. 단순히 맥주에 쓰는 재료가 아니라, 지역의 새로운 산업 소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목표는 “포항에서 홉을 키우고, 맥주를 만들고, 관광객이 찾아오는 선순환 구조”다.“누군가는 시도해야 변화가 생깁니다. 처음엔 농사꾼이 아니라 맥주쟁이였지만, 지금은 포항의 땅이 저한테 말을 걸어요. ‘이제 우리가 만들어보자’고요.”■ 김진동 대표의 도전은 아직 시작 단계다그가 재배한 홉은 포항의 뜨거운 햇살, 습한 공기, 짭조름한 바닷바람 속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의 말처럼, 좋은 홉이 좋은 맥주를 만든다면, 포항의 맥주는 이미 첫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포항에서 홉을 키운다는 건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포항의 가능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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