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양조장 한켠에서 향긋한 풀내음이 퍼진다. 홉(hop)을 건조하는 향이다. 맥주의 향과 쓴맛, 그리고 균형을 결정짓는 이 작지만 강렬한 식물은 이제 포항의 땅에서 자라며 한국 수제맥주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홉은 단순히 농작물이 아니라 기술이에요.”포항에서 ‘에이홉(A-HOP)’을 운영하는 김진동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홉을 ‘향을 설계하는 원자재’로 정의하며, “재배·건조·추출까지 모두 하나의 공정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재배가 아니라 산업적 혁신의 방향을 암시한다.■ “일제강점기엔 강원도와 북한에서도 홉을 키웠어요”국산 홉은 사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김진동 대표는 “과거 일제강점기 때는 강원도랑 지금의 북한에서도 홉을 키웠어요. 지금도 북한은 대동강 맥주를 자체 홉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90년대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수입 농산물에 밀려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의 다 사라졌죠.” 하며 안타까워 했다. 그는 한국 맥주 산업이 일본·독일식 라거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홉의 쓰임이 제한되었고, 그 결과 “값싼 수입 홉만으로도 충분한 시장 구조가 고착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수제맥주 시장의 성장과 소비자의 다양화된 취향은 이 구조를 바꾸고 있다.■ “싸게만 만들다 보면 결국 나락으로 갑니다”국산 홉 재배가 어렵다고들 하지만, 김진동 대표는 “문제는 기술보다 인식”이라고 말한다."다들 원가만 보고 싸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맛도 향도 사라져요. 홉은 단가보다 ‘완성도’를 봐야 하는 작물이에요."이광근 대표(포항수제맥주)도 이에 공감했다.“홉은 방향성 물질이에요. 맥주에만 국한될 게 아니라 향수나 화장품,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확장될 수 있죠.”그의 말처럼 홉은 맥주 원료를 넘어 ‘식물 향 산업’의 자원으로 진화 중이다. 김 대표는 실제로 초임계 이산화탄소 추출기를 도입해 홉 오일을 분리하고, 화장품·의약·기능성 식품으로의 응용을 연구하고 있다.
“향 성분 지도를 만드는 게 목표예요. 홉 추출물의 기능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싶습니다.”
■ “이제는 홉의 저변을 넓힐 때입니다”
김 대표는 단순히 포항의 농업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국내 홉 산업의 ‘저변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저는 해외 시장도 좋지만, 지금은 국내에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수입 대체 효과가 있고, 가격 변동이 심할 때 안정 공급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줘야죠.”그는 이어 “홉이 필수작물은 아니지만 가격 편차가 크기 때문에, 국산 홉은 위기 때 공급을 안정시킬 ‘대체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이광근 대표도 덧붙였다.“부유한 나라일수록 이런 향 산업은 필수에 가깝습니다. 맥주뿐 아니라 향료·음료·헬스푸드까지, 홉은 원자재입니다.”■ 수제맥주 산업, 구조적 변화의 문턱에서한국의 수제맥주 산업은 급성장 중이지만, 여전히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원료 대부분이 수입산이고, 주세법은 소규모 양조장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특히 맥주 원료의 ‘국산화’는 정책적으로나 산업적으로 지원받기 어려운 영역이다.이광근 대표는 “수입 홉 의존도를 줄이는 건 단순한 애국이 아니라 산업 생존의 문제예요. 원료 가격이 오르면 바로 맥주값에 반영되고, 그게 시장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라고 말했다. 김진동 대표도 덧붙였다. “결국 우리나라 맥주도 ‘맛’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소비자가 다양한 향과 질감을 경험할 수 있어야 산업이 고도화됩니다. 그 시작이 홉이에요.”
■ “포항에서 시작된 변화가 전국으로 번질 겁니다”
이광근 대표와 김진동 대표의 협업은 단순한 지역 실험이 아니다. 포항산 홉으로 만든 맥주가 상업 유통까지 이어진다면, 한국 크래프트 비어 시장의 ‘K-hop’ 생태계가 시작되는 셈이다.이광근 대표는 말했다. “포항 홉으로 만든 맥주는 향이 조금 거칠지만 생동감이 있어요. 그게 지역 맥주의 매력 아닙니까?”두 사람은 현재 포항에서 재배한 홉의 품질 안정화와 ‘포항산 100% 맥주’의 시제품 확대를 준비 중이다. 국내 수제맥주 업계에서도 “포항의 실험이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결국 좋은 맥주는 좋은 땅에서 나온다”김진동 대표는 인터뷰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했다. “홉이 자라는 땅이 건강해야 좋은 맥주가 나옵니다. 결국 땅이 맥주의 품질을 결정짓죠. 저는 포항의 땅이 이제 그걸 증명하고 있다고 믿습니다.”그의 말은 지역 산업의 본질을 다시 일깨운다. 좋은 맥주는 기술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땅에서 자라난 사람과 자연, 그리고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포항산 홉과 포항산 맥주의 협업국산 홉 재배와 지역 양조 협업은 단순한 ‘포항의 사례’가 아니라, 한국 수제맥주 산업이 수입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포항의 땅에서 자란 홉이 전국의 양조장으로 퍼져나가는 그날, ‘K-크래프트 비어’는 비로소 진짜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