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지금 이일선 목사인가 : 글을 위한 작은 생각 나눔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목회를 시작한 지 이제 만 8년이 지났다. 신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는 아무래도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면서 한국교회에 대해 비판하던 입장이었다. 그런데 교회 현장의 담임목사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어느덧 비판의 대상이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인 ‘담임목사’가 되어버렸다.‘나’라는 인물의 정체성 중에서 오직 바뀐 것은 단 하나, ‘신학교 교수’였다가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개혁을 외치던 자’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개혁을 외치다가 제도권의 중심으로 일종의 변절(?)을 한 것처럼 보는 시선도 있어 꽤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방이 아닌 서울, 그것도 서울의 중심에 있는 ‘중구’에서, 규모도 제법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니 그런 시선도 있을 만했다. 이로인해 겪는 혼란과 더욱 무거워진 책임감은 오롯이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을 정리하고 오직 맑은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목회에 집중하고 있다.지난 8년의 세월 동안 목회의 영역 도처에 어려움이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교회 안에 있었던 몇 가지 갈등, 이로 인한 성도들의 분열과 상처,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인한 교육부서의 감소와 같은 시급한 문제들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한국교회의 위상 추락과 더불어 코로나19로 인한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회자로 서 있는 나 자신을 엄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니, 목회의 경험과 내공이 많이 부족했다. 그럴수록 더욱 매일매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온 8년의 세월이었다.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을 따라 교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목사로 헌신한 이일선 목사에 관한 자료를 틈틈이 읽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난 2022년은 이일선 목사가 태어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였다. 처음에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며 신일교회의 창립 77주 년에 맞추어 이일선 목사를 기념하고자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 검토했고, 국한문으로 된 설교를 정리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일 선 목사에 대한 글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이일선 목사를 한국교회 앞에 소개해야겠다는 소명감과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목회하는 중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그분에 대한 전기를 써서 얼마 전에 출간하였다. 지난 10월 교회 창립기념일 및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펴낸 책 『등에는 십자가, 입에는 노래』가 바로 그 열매이다.| 이일선 목사: ‘한국교회사’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이일선 목사는 한국교회사에 감추인 보화이다. 이일선 목사가 감추어 진 데에는 사정이 있다. 이일선 목사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 조선신 학교에 입학하였다. 모두가 아는 대로 조선신학교는 장로교단이 분열 한 후에 현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의 한신대학교가 그 학맥 과 신학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얼핏 생각하면 이일선 목사를 기장 측 목사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자연히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를 교단 신 학교로 운영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 통합 측에서 이일선 목사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그렇다면 조선신학교 출신인 이일선 목사가 왜 기장 측에서는 잊혀졌는가? 이는 1953년 장로교회가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될 때, 이일선 목사가 목회하던 신일교회는 이듬해인 1954년에 중립을 선언하고 기장에 소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신일교회는 27년간 중립을 지키다가 1981년 예장통합 교단에 가입하였다. 그 사이의 기간에 이일선 목사는 1960년에 울릉도에 들어가서 18년간 그곳에서 목사보다는 의사로서 사 역하였다. 교단적 영향이나 입지가 거의 없었던 이일선 목사는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잊히게 되었다.| 이일선 목사를 한국교회 앞에 소개하는 몇 가지 이유대부분 목사는 자신이 목회한 교회나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점점 잊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한국교회의 위상이 추락하고 스승으로 모실 만한 롤모델이 없는 시대에 왜 하필 이일선 목사를 소개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필요하다.우선 필자가 이일선 목사에 대한 책을 써서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일선 목사가 단지 필자가 목회하는 교회의 초대 목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인 두 가지 의미가 있다.첫째, 이일선 목사가 살아온 삶과 목회 자체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큰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이일선 목사의 삶과 목회에는 이 상촌 운동, 슈바이처의 의료 사역, 목회 사역이 함께 녹아 있다. 그래서 한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인격적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 고 그때에 사회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이일선 목사의 사역을 깊이 연구해보면, 오늘날 위상이 추 락한 한국교회가 사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통찰을 얻 을 수 있다.둘째, 이일선 목사의 삶에는 일제의 수탈과 해방, 한국전쟁과 교계의 분열 같은 한국교회사의 중요한 역사적 궤적이 그대로 녹아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기로 한 신앙인이 목회자와 의사로서 이 격동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닥쳐온 시대의 중요한 질문들(에큐메니컬 운동, 교회와 사회의 관계,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문제 등) 앞에서 어떤 대답을 내릴지 좋은 통찰을 제공 받을 수 있다.이러한 몇 가지 서론적 설명을 생각하면서 이일선 목사의 삶과 목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일선 목사는 신일교회를 세우고 이상촌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그가 쓴 책 『이상촌』이 장로교 교단 분열의 도화선이 되면서 교단 분열을 한복판에서 경험하였다. 이후 6·25 전쟁 때에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휴전 이후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피부과 의사직과 신일교회 담임목사직을 병행하였다. 이후 울릉도로 떠나 울릉도 지역민과 한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다가, 미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삶과 자취를 간단히 연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일선 목사의 삶과 자취> 이번 글에서는 이일선 목사의 삶의 초반부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이일선 목사가 신학을 공부하여 신일교회를 세우고 이상촌 운동에 헌신한 시기이며, 두 번째는 이일선 목사의 책 『이상촌』이 도화선이 되어 시작된 교단 분열의 시기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목사였던 이일선이 의사, 그것도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피부과 의사가 되어 활동한 시기이다.| 알 목사,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세우다이일선(李一善, 1922-95)은 1922년 1월 26일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강신성 여사의 독실한 신앙을 보고 배운 이일선은 주일에 들은 목사님의 설교를 그대로 외워 따라 할 정도로 총명하고 웅변에 능하여 어릴 적부터 별명이 ‘알 목사’(an egg pastor)였다.그러나 아버지 이성언 씨가 일찍 죽고, 어머니와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형편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교 급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기도 하였다.중학교 시절 이일선은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한영중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중학교에서 교목을 하고 있었던 김재형 목사는 이일선의 총명함을 알아보고 학교에서 만드는 기독교 잡지 「부활」의 원고를 정리하는 일을 그에게 맡겼다. 17살이었던 이일선은 그 일을 하던 중에 슈바이처 박사의 『나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이후 이일선에게 슈바이처 박사는 동경의 대상이자 인생의 롤모델이었고, 슈바이처의 생활과 사상은 인생의 좌표가 되었다.중학교를 졸업한 이일선은 이후 만주에서 일을 하다가 1945년 만주에서 돌아오던 길에 “무너진 종각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당대에 신학교 입학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결단이 필요하였으나, 이일선은 곧장 그해에 조선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일제가 당시 운영하던 천리교당들을 미 군정청의 허락을 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당시 신당정[여기에서 ‘정’은 ‘동’(洞)의 일본식 표현]에 있던 신당정 포교소에 ‘신당정 복음전도소’라는 간판을 달고 1945년 11월 18일 어머니 강신성 여사 한 분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렸고, 이것이 오늘 날 신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이 시기에 이일선은 이후 삶의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만났다. 신일교회에 출석하던 김용기(金容基, 1912-88) 장로였다. 김용기 장로가 이끌던 이상촌 운동은 이상적 농민공동체를 이루려는 운동이자 동시에 농촌을 기독교 정신으로 변혁시키려는 농촌 복음화 운동이었다. 김용기 장로는 이일선 전도사가 당시 신일교회에 와서 주일학교와 반주로 도와주던 신학교 동급생 오길화와 결혼할 때(1947년 1월 1일) 주례를 맡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결혼한 바로 그해 4월부터는 이상촌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이일선 전도사 부부도 세검정 집단촌에서 얼마 동안 거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일선 전도사는 이미 신학교 시절부터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과 김용기 장로가 전개하던 이상촌 운동의 영향으로 복음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고민했으며, 이를 목회에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교단의 분열과 교회의 선택1947년 3월, 신학교 3학년이었던 이일선은 당시 봉안에 있던 이상촌(理想村)을 방문해서 그 방문기를 써달라는 잡지사의 부탁을 받고 쓴 글을 다듬어서 『이상촌』이라는 소책자를 펴내었다. 책의 서문은 당시 그가 존경하던 조선신학교의 스승 김재준 교수가 써주었다. 그런데 당시 김재준 교수의 신학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이를 심각하게 문제 삼았다. 『이상촌』 책에 주일성수를 가볍게 여기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을 알면서 김재준 교수가 어떻게 그런 책에 추천서를 써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논란의 중심이 된 부분은 『이상촌』 65쪽 “여름 농번기에는 예배시 간을 새벽과 밤으로 정하고 낮에 부득이한 일을 한다고 해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이었다. 사실 이 문장만 보면 주일성수 를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으나, 책의 전체적인 내용 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일선의 의도가 결코 이 문제를 논쟁의 주제로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이일선은 신학을 공부 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았고 목회를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그의 신학이나 목회적인 경험이 완전히 성숙하기 전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여하간 이 문제가 도화선이 되어 평소에 학교와 특히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은 1947년 4월 18일에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였다. 그 진정서에는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으나, 그중에서도 특히 김재준 교수에 대한 비판이 상당을 차지했다. 사실 이 진정서는 그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김재준 교수 등 몇몇 조선신학교 교수 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문제, 평양신학교와 조선신학교의 문제, 선교 사의 지위에 대한 견해 차이 등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교단 분열의 계기 중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그리고 이후에 이 문제를 다룬 1948년 제34회 총회에서 이일선 전도사는 언권을 달라고 요청하면서 격하게 항의하였다. 이때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이일선 전도사는 정학을 당했고, 목사 안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1953년 예장과 기장의 분열로 이어지는데, 이후 신일 교회 당회는 “본 교회로서는 당노회가 화합할 때까지 아무 편에도 가담치 않기로 하다.”라고 선언했고, 1981년까지 어느 쪽에도 가입하지 않 았다. 노회가 분열된 마당에 교회가 어느 한쪽에 가입하여 교회마저 분열될 수 없다는 이유로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이일선 목사는 김재준 교수나 기장 목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신일교회도 같은 노회 소속이었던 영락교회나 새문안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기에 이일선 목사는 울릉도에 가서 사역하면서도 초교파적인 협력과 사역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새로운 헌신의 길, 의사 이일선이일선이 목사 안수를 받고 신일교회에서 1950년 위임 투표를 통과하여 장년 성도가 260명, 교회학교 학생이 144명이 될 즈음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을 가서도 이일선 목사는 신광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17살 때부터 마음에 품었던 슈바이처의 생애를 닮고 싶은 생각, 도회지에서 월급 받는 목사가 아니라 더 어려운 농촌에서 나름의 이상촌을 이루어보고자 하는 마음은 늘 지니고 있었다.이런 이일선 목사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던 오길화 사모는 생계는 자신이 어떻게든 꾸려보겠다면서, 이일선 목사에게 의과대학 진학을 권하였다. 이에 이일선 목사는 자급자족하는 의사가 되고자 1951년 전시 연합대학 의과대학 편입생 모집에 응시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955년 졸업하였다. 이 와중에도 그는 특별한 기도 응답으로 신일교회의 부지를 마련하고 폭격으로 파괴된 신일교회를 다시 건축하 기 시작하였다.의대를 졸업할 무렵 이일선 목사는 기도하는 중에 하늘로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해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일에 대해서 이일선 목사는 “저는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주님”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날과 그 이튿날에도 동일한 주님의 음성을 두 번 더 듣게 되었을 때, 그는 끝내 한평생 한센병 환자를 위해 사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렇게 결심하고 항복했을 때 이일선 목사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 미와 왜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돌아가셨는지를 마음 깊이 깨닫고 마음에 기쁨을 얻었다.이일선 목사는 졸업 후에 모교와 원주대명구호병원 등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진료하였다. 당시 전국의 한센병 환자의 숫자는 대략 10만 명 정도였는데, 이일선 목사는 바쁜 목회 일정을 쪼개어 전국을 돌며 한센병 환자촌, 공동묘지, 다리 밑을 다니며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사실 목회와 의사 생활을 병행하는 것은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이일선 목사는 그 바쁜 목회 생활 중에도 순회 진료, 슈바이처 강연회, 각종 저서 및 논문 기고 등의 노력을 다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