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의 명작 〈설국열차〉(2013)에는 인류 역사의 축도라고 할 만한 열차가 등장한다. 바로 이 열차의 꼬리칸은 자본을 가지지 못해 빈곤에 허덕이는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곳이고, 머리칸은 자본을 가지고 있어 풍요를 누리는 지배층이 거주하는 곳으로 설계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꼬리칸과 머리칸을 잇는 칸을 원시사회, 농경사회, 문명사회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연출함에 따라 이러한 계급구조가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을 거치며 더욱 정교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에서 꼬리칸에 있는 자들이 아무리 절실한 분노를 가지고 혁명을 시도한다고 해도 기존의 시스템에서 탈피하지 않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실패를 향해 내달리는 열차에 제동을 가함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봉준호 감독 이전 역사에 관한 ‘신성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 이 중 하나는 독일의 평론가 벤야민(W. Benjamin)이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라는 매력적인 글에서 설국열차의 앞선 계보라고 할 만한 자동기계에 관해 적고 있다. 이 기계에는 상대가 어떤 수를 두든 그것에 응수하여 언제나 이기게끔 고안된 장기판이 설치되어 있다. 실제로 이 장기판이 놓인 상자 안에는 장기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들어앉아 장기를 두는 인형의 손을 조종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벤야민은 이 장치에 상응하는 철학의 짝으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일종의 ‘역사주의’를 향한 그의 변별적 입장이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주의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으로 채워진 진보에 매달려 있다면, 역사적 유물론은 그러한 역사적 연속체를 정지, 폭파하여 지금-여기로 충만한 시간을 구축하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눈앞에는 급정지로 인해 궤도를 이탈한 설국열차가 아른거린다. 이처럼 이 글에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과 겹쳐 읽게 된 것은 5월이 되면서 황지우의 시집을 꺼내 읽은 것에서 연유한다. 실제로 그가 두 번째 시집의 서두에 ‘징검다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고 미루어볼 때, 1980년대의 ‘성좌’를 수놓은 그의 시집은 벤야민의 자동기계와 봉준호의 설국열차 사이에 둘 만하다. 그래서인가. 첫 번째 시집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그가 적어도 스스로를 이름 모를 한 열차에 탑승한 승객으로 인식하려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그가 시집 곳곳에 노출한 날짜, 시간, 번호가 그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우리가 열차에 탑승할 때 숫자와 같은 정보만 중요할 뿐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열차의 목적지는 그가 시집에서 ‘초토’, ‘막다른 골목’, ‘잿더미’, ‘폐허’와 같은 공간을 떠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피사의 탑’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티켓을 다시 꺼내 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담아내고 있지 않지만, 그 여백에는 언어로 다할 수 없는 상당량의 정서가 함양되어 있다. 이전에 배치된 시들이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환기하고 있다고 볼 때, 이 시 역시 그것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건대, 제목에 나타난 5분 27초는 앞에 등장하는 ‘묵념’이라는 행위에 관여하는 수사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상 1980년 5월 27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날은 어떠한 날인가. 바로 1980년 5월 18일에 촉발된 광주민주화운동이 군부 독재의 잔혹한 폭력 아래 강제 진압된 날이다. 실제로 당시 전남도청은 5·18민주화운동의 최후 항쟁지로서 군부 독재가 자행한 유혈사태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때 전남 해남 출신인 시인은 그곳과 동떨어진 서울에 있었으니 누군가를 통해 건너들은 소식이 그에게 얼마만한 충격을 안겨줬을지 가히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이 시의 여백에 다하지 못하는 분노, 부끄러움, 애도 등 갖가지 감정들이 포개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황지우가 탄 ‘피사의 탑’행(行) 열차로 돌아가 보자. 그러면서 그가 결국 자신의 열차가 역사의 파국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걸 엿보게 된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자. 아마도 그는 두 가지 제동장치를 고안했던 것 같다. 하나는 도저한 허무주의나 무력감을 껴안고 현실을 넘어가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죽음과 폭력 사이에서 맹목적인 생존자로 살아가고 있는 점, 머잖아 차갑게 식어갈 에로티시즘을 연출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부패한 현실의 단면에 시퍼런 칼날을 대는 부정 정신을 견지하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유독 당대 사회의 얼굴이라 할 만한 신문기사 따위를 가지고 와서 이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내비치고 있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황지우가 탄 열차는 멈췄을까. 그건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겠지만, 어쨌든 그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해도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고 하는 점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열차에서 내려 ‘피사의 탑’을 재건하는 건축가의 길로 접어든 모양이니까 말이다.   보다시피, 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이 시는 언어의 건축으로 쌓아 올린 산의 형상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여전히 5·18민주화운동의 권역에 있으면서도 첫 번째 시집에서 보인 묵시록적 세계 인식에서 나아가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가 보기에 이제 무등산이 표상하는 광주는 생과 사, 침묵과 함성, 죽음과 부활, 희망과 절망, 현실과 꿈 따위의 대립을 넘어선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이 각각의 요소들은 지금-여기의 무등산을 이루는 주춧돌이기에 이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무등산은 다시금 ‘피사의 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시에서 각각의 주춧돌을 하나씩 고유한 자리에 놓으려는 시도를 사랑의 건축이라 부르면 어떨까. 역사는 결국 사랑의 건축술인 셈이다. 얼마 전 매스컴에서는 고 전두환 대통령의 손자가 광주에 가서 할아버지 대신 5·18민주화운동의 피해자에게 사죄를 표하고 그동안 고통의 세월을 보낸 유족들이 그의 사죄를 껴안는 모습을 전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막 사랑의 건축이 솟아오르는 것을 넌지시 보았을 거다. 글쓴이|최호영현재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