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ll ask me, why I rather choose to haveA weight of carrion flesh than to receiveThree thousand ducats: I`ll not answer that:But, say, it is my humour: is it answer`d?베니스의 상인 중 샤일록의 일화이다. 그는 사회적 분노를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한다. 인간의 생명을 담보로, 잔혹한 거래를 하는 이유에 있어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그저 유머에 불과하다. 불쾌한 단상이다. 하지만 샤일록, 그를 비난하기에 앞서 그가 경험했던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 기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를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의 생의 표출은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으며 사회를 변혁할 수 없을 때 그가 택할 기묘한 표출은 변태적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행위는 반인륜적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샤일록이 분명 옳지 않지만 그를 그렇게 몰아가지 않고 사회적으로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면 그가 그런 불행한 거래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탓에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 그의 생존법은 극단적이었다. 그의 생존법이 자연적으로 정당하나 공동체의 이법에 의거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못 할수록 그의 분노는 변태적이며 자극적이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응징으로, 혹은 더 약한 약자에 대한 핍박으로 투사되기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의 존재성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때, 사회 속에서 행복한 존재로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인정욕구가 사회체제와 불화를 일으킬 때, 충분한 이유 없이 차단 될 때, 그리고 그 이유가 불가항력이거나,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폭력적 핍박에 가까울 때는 사태는 위험해진다. 인정받는 존재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폭력적 항거를 하거나 혹은 가학적으로 존재 피력을 가하며 사회를 동요시킨다. 물론 그 동요는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매우 위험한 폭력을 수반한다. 물론 샤일록의 이야기는 기독교 윤리에 합당하게 샤일록을 처단하며, 그의 소요를 무화시킨다. 하지만 내가 이 지점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소요를 바라보기 위해서이다.요사이 우리는 다양한 가치의 혼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릴 피력하고 있다. SNS는 탁월한 매개이며 소통로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가학적이고 자극적인 자기 표출의 징후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수많은 샤일록들의 섬인 것만 같다. 인정받고자 하나 인정받지 못한 자들의 아우성. 배려 없고 잔혹한 자기 표출은 마치 버림받은 자들의 난삽한 소요 같다.그렇다면 모든 것이 샤일록의 문제일까? 기괴하고 부도덕한 그의 독특함 때문일까? 아니다. 나는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소통법이 개인의 자기 표현법이 샤일록의 거래처럼 투박하고 극단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양성과 관용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다양한 인정욕구가 소통되고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경쟁하며 분노하며 소요를 일으키고 있는것이다. 그것이 SNS의 현주소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위계적이며 타자에 대해 적대적이며, 또한 권위적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그러나 인정의 조건은 까다롭다. 삶은 다양하나 요구돼 삶은 제한적이다. 따라서 수 없는 샤일록들, 그들이 자신의 통로를 통해 자극적으로 소요하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움에 대한 본원적 저항인 것이다 그러나 접속이 끊어지면 외따로인 섬에서 인정받지 못한 존재가 되어 사회 속에 부유하고 만다. 불온한 우리 시대의 샤일록들 샤일록을 탓하기 전에 샤일록을 양산하는 우리 공동체의 부조리를 봐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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