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하나의 상징이 된다는 건 불행한 일일지 모른다. 그건 아무도 가지 않은 수난의 길을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최후에 내던진 목숨은 오롯이 블랙홀과 같은 상징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름이 하나의 상징이 되는 건 특별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걸어간 길은 현재 이 사회를 진단하는 척도가 되고, 장차 이 사회가 걸어가야 할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는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역설적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징의 사례로 전태일을 들 만하다. 그의 이름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일종의 변곡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 공장에 들어가 미싱사의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도하였다. 노동자들이 하루 14시간이라는 과도한 노동시간을 부여받은 것은 물론 제대로 된 환기 장치조차 없어서 어린 노동자들이 폐질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말이다. 그때 그가 알게 된 근로기준법은 암흑 속 한 줄기 빛과 같았으나, 이마저도 권력기관의 무시와 방해로 철저하게 짓밟혀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세상에 알렸다. 1970년 11월 13일,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이처럼 전태일의 극적인 삶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뜨거운 열정을 가진 노동자의 면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그가 결국 미완성이기는 했으나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한 감이 있다. 이 점이야말로 전태일이라는 상징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 모른다. 그러면 소설을 쓴다는 것, 즉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아마도 문학을 한다는 것은 지금-여기에서 보다 나은 사회와 세계를 꿈꾼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의 죽음이 결코 우발적인 저항이 아니었듯, 그의 소설은 강철로 무장한 당위의 세계에 균열을 내고 진정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내다보고자 했던 고뇌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은 그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중략…)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명체의 본능입니다. ― 전태일, 〈전태일 소설〉, 《전태일은 살아 있다》, 푸른사상, 2020 이 소설은 전태일의 자전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결코 그의 삶 자체에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소설 초반에는 유서 형식을 통해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투영되어 있으나, 이후 “철망 울타리 앞의 조그만한 꽃밭”의 상황을 통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노출된 노동자의 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때 소설에서는 “선생님”을 향해 한 노동자 가족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자연스레 건드리고 있다. 즉, “30명의 자녀”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아버지는 자본가계급을, 그리고 거기에 예속되어 불합리한 노동환경이 개선되기를 요구하는 “자녀들”은 노동자계급을 나타내며, 이들의 비대칭적 관계는 자본의 불평등한 분배를 양산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들어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외치는 생명은 그저 “더 많은 양의 빵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의미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천부적으로 부여된 “인간의 생명”으로서 모든 이에게 평등하고 고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간의 생명”이 그 어떠한 차별성을 넘어서는 보편성에 속한다고 한다면, 이 보편성은 인간 그 누구라도 이러저러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름 아닌 무엇이라는 고유명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가능성의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파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다시 이름의 상징이라는 문제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에 어떠한 정체성을 부여해왔는가를 물어볼 법하다. 첫 번째로, 전태일이라는 이름에는 활활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서 ‘불꽃’의 상징이 따라다닌다. 이 불꽃은 짧지만 강렬한 삶을 살았던 그의 청년기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근로기준법을 불태워 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꿈꿨던 그의 염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불꽃의 세례를 받은 그는 어김없이 십자가, 예수, 성자로 대변되는 순교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전태일의 삶에 가장 근접한 발상일 수 있겠으나, 달리 보면 타오르는 그의 이름에 석유를 끼얹는 발상일 수 있겠다. 두 번째로, 전태일의 이름은 ‘나비’의 상징을 통해 전혀 다른 존재로의 환생을 감행하고 있다. 부서진 구두통을 든 소년이 있었다// 세상의 우리라는 무리가 밀어낸/ 지상의 벼랑이 있었다// 검푸른 희망이 넘실대는/ 구정물의 바다가 있었다// 일렁이는 오물의 이랑을 따라/ 흰 나비가 두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허연, 주먹보다 약간 큰/ 양배추가 날고 있었다// 날지 못하는 시조새처럼/ 날고 있었다// 한 손으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나비를 붙잡으러/ 소년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나비는 뒤뚱뒤뚱/ 달아나고 달아났다// 소년의 퀭한 눈 속으로 뉘엿뉘엿/ 핏물 든 해가 졌다// 붉은 해를 삼켜 배가 부른 바다는/ 소년을 토해놓았다// 소년의 이글거리는/ 가는 눈동자는/ 태초의 지상에서 밀려나고/ 벼랑에서 밀려나고 바다에서도 밀려났다// 바다야, 바다야, 양배추를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너를 구워 먹으리// 소년은 노래를 불렀나/ 마침내 불타는 철조망을 넘었다 무언가에 이끌려// 법과 질서와 규범과 훈계를 넘어/ 나비와/ 나비를 따라간 소년 자신을 넘어/ 주먹보다 큰/ 허연 양배추의 유혹을 넘어// 구두통을 넘어/ 노동법을 넘어 노동자를 넘어// 풀죽어 되돌아서지 않고/ 짓밟히며 일그러지며 추방되어// 철조망의 바리케이드와/ 일렁이는 바다의 검푸른/ 매트릭스를 넘었다// 오로지 인간/ 원초의 인간// 그 하나를 그리며// 나비 날개의 참혹한 무게가/ 바다의 정수리에 떨어진다// 이지러진 나비가 날아오를 때마다/ 바다를 구워 먹은// 소년이 불타오른다 ― 전비담, 〈바다를 구워먹은 소년〉, 《전태일은 살아 있다》, 푸른사상, 2020 이 시에서 나비는 “부서진 구두통을 든 소년”이 냉혹한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바다”와의 관계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다른 존재로 변모해가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에 나비는 냉혹한 현실 세계의 논리를 뒤쫓다가 장렬하게 패배한 자의 뒷모습을 비춰준다. 그가 본 바다는 어릴 적 부산 영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바다가 아닌 “구정물의 바다”였고, 인간의 추악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오물의 이랑”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먼지와 기름을 뒤집어쓰고 구두를 닦아도 나날이 “허기진 배”를 어찌할 수 없었으니, 바다에 떠내려오고 있는 “흰 나비”를 자신의 식욕을 돋우는 “양배추”로 오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허기가 고통으로 변해갈수록 점점 바다를 배 불리게 하는 현실을 발견하게 되고, 이때 우리의 눈앞에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나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소년은 수없이 바다에 휩쓸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삶의 진실 하나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는 바다를 뛰어넘을 수 있는 단단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전까지 자신의 허기를 기만하던 “양배추의 유혹”을 넘게 되고, “법과 질서와 규범과 훈계”와 같은 냉혹한 현실의 논리를 넘게 되고, 그리고 “철조망의 바리케이드”와 “바다의 검푸른/ 매트릭스”와 같은 억압의 장애물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면 그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건 “이지러진 나비가 날아오를 때마다/ 바다를 구워 먹”는다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속악한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의 바다가 아니었을까. 거기서 그는 ‘기계’와 같이 자신에게 부여된 단일한 정체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존재의 가능성을 지닌 “오로지 인간/ 원초의 인간”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꿈은 거친 바다에 휩쓸리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법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생사를 달리하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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