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어떤 점에서 인간의 한 여정이 다다르는 종착점이라 여길 만하다. 어느 순간 우리의 몸이 그것을 먼저 감지하고 있다는 걸 우리의 머리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우리가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지난 길목 위에 떨어져 있는 숨들을 뒤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의 눈은 갖가지 빛의 사건이 벌어지는 밤하늘을 향하기 마련이다. 실제로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밤하늘을 장악한 별자리를 올려다보고 인간의 여정에 관한 질문을 던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헝가리 출신의 문예평론가 게오르크 루카치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인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는 시대는 복되도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새롭지만 친숙하며, 모험에 찬 것이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다. 세계는 넓지만 마치 자기 집과 같은데, 영혼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이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본질적 특성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문장은 그의 주저 《소설의 이론》(1916)의 서두를 장식한 것이다. 그러면 루카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밤하늘을 향해 어떠한 질문을 던졌던 것일까? 사실 우리가 그의 질문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우리 앞에 마땅히 가야 할 길이 놓여 있었고 우리와 세계를 한 몸으로 연결하던 총체성의 이념이 무너진 현장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밤하늘의 별자리를 이정표로 삼았던 시대로부터 우리가 멀어지면서 진정한 인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때야 아득한 심연을 드리운 개인이 출현한 것이고, 그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양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길은 각자의 몫이 되었다. 이처럼 필자가 루카치를 통해 인간의 여정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비단 올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긴 일에서만 연유하지는 않는다. 마침 필자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졸업을 앞둔 선배를 위해 환송회를 준비하던 중 응원 영상을 요청해온 게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이 글은 응원 영상에 미처 담지 못한 내용의 주석이라는 걸 고백할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에게 졸업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 전체에 바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앞둔 이를 향해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가지 않은 길》, 창비, 2014 이 시는 어떠한 길에 관한 인간의 선택 문제를 다루고 있고 그 선택으로 인해 그의 앞날에 펼쳐졌을 삶의 양태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그는 “노란 숲속에” 난 “두 갈래 길”을 앞에 두고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최선의 것이길 바라기에 두 길을 신중하게 견줘보았다. 그러고선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더 끌렸던 다른 길”을 선택하였고 먼 미래의 자신이 느끼게 될 자기 선택의 의미를 전달하였다.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을 택한 결과 자기 삶의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누구나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미지의 길을 개척해온 사람을 향한 경탄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간 이러한 통상적인 해석을 오해해왔다고 보고서 다른 해석을 시도한 사례를 목도할 수 있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시에서 화자가 먼 미래에 한숨 쉬며 이야기하는 행위를 “기억을 윤색해서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불어넣고 위안받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한 사례(문소영)가 있다. 심지어 이 시를 “자의적 선택에 사후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꼬집은 시”라고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둔 경우(신형철)도 있다. 이런 해석을 보고 있노라면 시가 우리의 삶에 특별한 산소를 공급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삶이 시에게 불확실한 산소를 넘겨주기도 한다는 걸 깨닫는다. 이 글 역시 시의 입에 산소호흡기를 물려주려는 작은 시도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자가 택한 길이 꼭 다른 길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두 길이 “똑같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에 꼭 하나의 길만이 두드러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는 그가 택한 길이 다른 길에 비해 특별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의 심리상태에서 비롯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사실 얼마나 많은 이가 이 길을 택했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이 길이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시에서 길을 삶의 목적지로 설정하는 것을 지나 우리의 인생 자체를 비유하는 지점에 들어서고 있다. 이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결국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그가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뒤를 내다보며 미래의 자신을 정확히 ‘두 번’ 호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생을 진정 추동하는 동력이 어떠한 외부의 조건에 있다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닌가. 이에 대한 니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것도 좋다.나 너희에게 위버멘쉬(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략…)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9 니체에게 인간은 결국 현실 저편의 초월적 세계나 사후세계에 얽매인 노예가 아니었다. 그에게 진정한 인간은 지금-여기, 즉 대지의 삶 자체에 충실한 존재이자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해가는 존재였다. 그러니 그는 끊임없이 기존의 자기를 깨부수고 새로운 자기로 거듭해가는 창조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어제의 자기와 오늘의 자기를 잇는 교량의 존재가 된다. 그는 결국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꺼이 자신의 성장을 꾀하려는 교량술의 주체가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졸업은 일회성의 행사가 아니라 나날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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