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영의 토담이라는 소설을 접하게 된 것은 브루스 커밍스에 의해서였다. 그는 20세기 초 한국의 이중적 모순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의 짧은 스토리를 인용하고 있었고, 담박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바라본 한국의 식민지 모순은, 불운한 한국의 삶의 조건을 잉태한 식민지 시대의 단상뿐만 아니라, 그 근저의 모태가 된 제국주의적 다위니즘이 망라된 총체적 모순이었다. 그는 일제 하의 조선인들 중 도미한 재미 조선인의 삶을 통해 모순을 조망하였는데, 특히 김난영의 토담에 나타난 인물 군상들 속에서 그 모티프를 발견한다. 탁 트인 벽 없는 집으로 상징되는 자유의 나라 미국, 그러나 그 속에 온존한 보이지 않는 벽, - 즉, 민족과 인종 그리고 제국주의적 우월주의가 팽배한 점잖은 보이지 않는 `제국의 벽`이 바로 그것이다.-을 통해 모티프는 극에 이른다. 김난영은 이러한 벽의 존재감을 실감하며 절망을 경험하는 재미 교포의 삶을 조망하고, 브루스 커밍스는 그 삶의 조망 근저에 놓인 제국주의가 만든 다양한 유형의 장벽을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모순의 씨앗은 일제 강점이 끝이 난 후에도 다양한 양태로 한국적 정서를 지배해왔고, 또한 한국 엘리트 정치의 암묵적 반려자로 군림해 왔다. 특히 일제 식민지 이후 전개되는 분단의 비극과 비극의 극적 효과를 위해 기획된 듯한 온갖 비합리성의 지배체제, 또한 여전히 존속하는 제국주의적 망령에 의해 파종된 패배주의와 그에 반향으로 일어난 일류지향적 태도는 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바로 이러한 모순의 씨앗을 바라보며, 한국의 변질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아래 함몰된 고유의 인간주의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토담이라는 소설 속에 드러난 모순의 씨앗의 한 양태인 미국의 제국주의에 주목한다. 그리고 또한 김난영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인간 삶의 진정한 가치, 토담의 둘레 치기를 통한 고유한 인간성의 보존을 회복하고자 한다.토담은 일제시대 식민지 모순을 잉태하고 도미한 재미 조선인인 한국인 전씨와 혜수 그리고 그녀 자녀들의 삶을 통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국주의의 젖줄인 자유의 나라 미국의 삶 속에서 헤수는 새로운 지향을 얻게 된다.조국 독립과 자유의 나라를 지향하는 일련의 지식인들과 교우하며 혜수는 희망의 가능성을 마음에 품는다. 조선의 여성으로 태어난 혜수는 봉건시대의 억압적 기제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울 수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삶을 만족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갑게 다가와 분노를 일으키는 `고요한 차별 `앞에 절망을 경험한다. 담벼락이 없이 탁 트인 자유의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을 마주하게 된 혜수는 그것이 이주민인 까닭이라 위안한다. 조국을 잃고 도미한 자신의 현실 조건은 합리적인 국가의 일원으로 합당한 대우를 받기에 부족함이 있음을 그녀는 재빨리 인정하게 된다. 그 인정의 근저에는 미국에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아이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희망과 경제 행위에 있어 보다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대한 미약한 희망 때문이었다.그녀의 남편 전씨는 청과물 판매 사업을 하며, 부를 축적해 가고 있었고, 그가 최선을 다하는 한 그 누구도 그의 부 축적에 대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삶이 안정되고, 자식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들에 대한 고요한 차별의 벽은 허물어질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에 불과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그녀의 자식들을 보다 좋은 여건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옮기려 했을 때야 비로소 그녀는 그 보이지 않는 벽이 결코 무너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동양인, 그리고 식민지국가의 유민인 그들에게 백인사회는 결코 문을 열지 않고 있음을 그녀는 신사적인 백인 학교 교장의 냉소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녀가 미약한 희망의 좌절과 절망, 분노와 한탄을 동료들에게 내보였을 때, 그 차가운 벽을 매일 매만지며 살아온 동료들은 그녀의 망상을 질책했다.혜수가 이처럼 탁 트인 자유의 보이지 않는 벽을 깨달아 갈 때, 언제나 그녀의 옆에서 침묵을 고하며, 조선인 특유의 우직함을 지킨 전씨는 늘 토담을 이야기했다. 전씨는 봉건적 인물이며, 가부장적이며 전 근대적 인물이다. 그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가장 큰 삶에 이유였고, 그에게 가족이란 아주 중요한 가치였다. 독립과 자유, 그리고 거창한 이상의 지향은 사치였으며 망상의 일종이었다. 이러한 전씨의 삶은 혜수의 지향과 너무나 달랐으며, 때때로 혜수가 전씨에게 환멸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혜수와 전씨는 자신들의 가족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헌신적이었다. 전씨는 헤수의 민감한 반응보다 묵직한 침묵과 생존을 위한 탁월한 타협으로 미국의 삶을 살아갔다. 그는 누구보다 그 차가운 차별의 벽을 먼저 인식했고, 가능한 그 벽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위선적인 탁 트인 미국의 공고한 차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싶었는지 늘 집 울타리에 토담을 짖고 싶어 했다.   토담은 자기 보호를 위한 배타적인, 벽 쌓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었고, 일종의 저항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인식에 대해 혜수는 늘 부정적이었고, 토담을 짓는 것을 반대했다. 혜수에게는 자유의 나라에 대한 미약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여성으로 자유를 침묵해야 했던 지난 삶으로부터, 전씨라는 봉건적 인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희망, 자유의 나라에서 자신의 삶이 조국을 위해 티끌이나마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 차별 없이 자식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물려 줄 수 있다는 미약한 희망, 바로 그 희망을 간직한 채 혜수는 전씨의 토담 짓기를 부정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혜수는 차가운 차별의 벽이 결코 무너질 수 없음을 깨닫고, 또한 그 희망이 절망임을 깨닫고 전씨만 남겨 둔 채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때 조선은 식민지였고, 그녀에게 조선은 미국보다 나은 삶의 조건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조국이라는 미약한 심정적 안락함만 보이지 않게 그녀를 지탱할 뿐이었다.계속해서 이야기는 혜수와 전씨의 이야기를 등에 업고 그녀의 막내딸인 페이의 이야기를 통해 전개된다. 민감한 감수성의 이상주의자 혜수와 오류투성이며 봉건적이지만 냉정한 현실감각을 가진 전씨, 그리고 그들의 2세 페이의 삶을 통해 작가는 자유주의의 허위를 폭로하며, 그 척박한 땅에서 조국을 잃고 살아간 이방인의 삶을 따듯한 시선으로 위로하고 있다. 특히 1세대인 전씨와 혜수의 척박한 삶의 개척 속에서 미약하게나마 생동하던 희망이 2세 페이에게서 무참히 허물어 내리는 자유의 허위를 바라보며, 작가 김난영은 자유의 허울을 덮어쓴 제국주의의 차가운 차별의 벽을 폭로한다. 페이는 민감한 혜수의 화신이며, 미약한 희망으로 자기 위안할 가능성이 사라진 혜수의 절망을 상징했다. 페이는 작가 김난영의 화신이기도 했으며, 타국의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20세기 세계사적 모순을 담지한 채 살아가는 모든 이의 화신이기도 했다. 작가 김난영은 조국을 떠난 20세기 조선인의 삶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드는 모든 시선을 음지에서 들추어내 비은페시키고 있다. 글 속에서 그녀는 혜수의 미약한 희망이 절망으로 현실화 되는 과정을 리얼리티에 입각해 서술하며, 전씨와 혜수의 갈등을 통해 그 시절 조선인들이 마주한 모순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2세인 페이가 보다 공고한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 속에서 겪어야 했던 삶을 통해 자유의 나라가 차별로 점철된 제국주의의 전형임을 폭로하고 있다.이러한 김난영의 글을 통해 토담은 차별의 벽에 저항하는 조선인의 척박한 실존으로 상징화된다. 토담은 조선인 고유의 생활 양식이며 온화한 공동체성을 표상한다.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처럼 개인화된 단절의 둘레 치기가 아니며, 더구나 벽이 허물어진 보이지 않는 차별의 울타리도 아니다. 토담은 이 사이의 어떤 존재 양태이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이 양극단을 종용하며, 철저히 개인화되거나, 혹은 벽이 탁 트인 자유를 강요한다. 보이지 않고 탁 트인 듯하지만 철저히 차별하는 자유의 나라, 그곳에서 토담을 짓고자 했던 전씨는 각박한 실존에 대한 저항을 통해 따듯한 조선인 고유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김난영의 소설을 통해 브르스 커밍스는 많은 단상을 그의 글 속에서 그려낸다. 그는 토담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 했던 전씨, 소설 토담을 통해 보이지 않는 벽에 저항하려 했던 작가 김난영을 통해 제국주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비은폐 시키며, 그 시절 한국인의 삶을 역사가로서 조망하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토담이라는 소설과 상징 그로부터 추출 가능한 시대의 정서, 그리고 그 아래 놓여 있는 근원적 물음들, 브르스 커밍스는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았지만 많은 고민을 녹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들을 품고 읽어내렸던 토담이라는 소설은 리얼리티에 입각해 있어 보다 진솔하고, 삶의 조건에 대항해 삶을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또 하나의 재미를 찾아볼 수 있었다. 희망과 절망, 그리고 저항, 인간 삶의 진행 속에서 반복하는 이 문제를 참혹한 시대와 첨예한 차별 속에서 누구보다 적실히 살아간 인물들을 통해 접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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