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어떻게 폭동을 일으키는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악셀 호네트의 답은 “사회적 무시와 모욕에 대한 분노로부터 모든 정치적 투쟁이 시작된다”라는 진단에서 시작한다.호네트의 `인정투쟁`에서 그는 대중의 인정투쟁을 수렴하지 못하는 사회체제에서 불화가 발생하며 그 불화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정치의 몫이라 주장한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때 분노는 폭동으로 번지게 되는데, 사회적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다수의 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호네트의 주장에 따르면, 최근 발생하고 있는 ‘분노’의 양상은 사회체제가 개인을 소외시키고, 정치가 그 소외를 긍정적으로 해소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왜 다중의 결집과 사회적 폭동의 형태가 아닌 소수의 분절적인 폭사, 그리고 더 짙어지는 고립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호네트의 진단, (조지오웰이) 폭로했던 빅브라더의 시대가 만든 소외현상과 불화, 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그 해답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이며,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고립된 개인의 사회적 분노의 표출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완료가 아닌 출발로서 조야한 수준의 제안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하루키의 소설은 내가 늘 느꼈던 것처럼 난해하고 음울하고, 습윤했다. 친해지기 힘든 대화였지만, 다만 한가지 그의 소설 전반을 관류하는 리틀피플의 개념은 매우 흥미로웠다. 리틀피플은 IQ84에서 난해한 형체로 구체화되지만, 그의 소설은 늘 불분명한 그들을 넌지시 은폐도 비은폐도 아닌 그 중간의 방식으로 알선한다.내가 해석한 리틀피플은 욕망하는 인간 다수의 연대체이며, 기사단장을 죽이고 이데아를 구성하는 기저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틀피플은 현현하는 구성적 힘이며, 파괴적 역능이기도 하다. 까닭에 우리 사회의 위기를 진단함에 있어 하루키의 사유, 즉 리틀피플에 대한 이해는 되새겨 봄 직하다.   하루키에게 있어 현대사회가 앓고 있는 병증은 거대한 힘, 즉 신체로 느껴지지만, 의지로 지각할 수 없는 바로 그 힘에 짓눌려버린 연대하지 않은 고립된 최대 다수의 절망이 야기한 분노에서 촉발한다. 이 분노는 무지에서 탈주하여 각성한 반체제적 인간으로서의 오웰의 분노(소설 속 윈스턴의 분노)와는 다르다. 이 분노는 자기 모멸적이며 자기 파괴적이다. 이러한 분노는 불화를 촉발하는 사회체제에 대한 발산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함열의 형태로 출구 없는 자기파열을 일삼기에 광범위한 무력증을 촉발한다. 함열은 공통의 분노가 사회적 연대로 결집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분노의 표출은 내적이며 무기력하다. 진단이 오웰의 빅브라더의 시대와 달라진 까닭은, 빅브라더의 오마주인 리틀피플이 그 힘의 주인이자 노예라는 불온한 사실 탓이다. 아이러니이다. 조지오웰이 진단한 빅브라더의 세계를 관류하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적대적이며 전복적이다. 이때의 분노는 소외를 기획하는 빅브라더를 균열시키고 체제의 모순을 비은폐 시키며 불화의 근원에 접근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분노는 불화의 실체를 파악한 노예들의 연대를 추동하는 동력이며, 외부로 발산하는 힘으로서 해방의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분노는 사회적이며, 집단적이다.하지만 오늘날 리틀피플의 시대는 다르다. 분노는 리틀피플을 향해 자기 파괴적 분노를 야기할 따름이다. 따라서 권력은 빅브러더가 은폐했던 기획성을 은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획은 노출시키고 불화를 부추기며, 모순을 비은폐 시킨다, 주인과 노예의 경계를 와해시키며, 모순된 세계의 주체로 모두를 동참시킨다. 그것은 유행과 소비의 행태로 드러난다.가치, 선악, 정의라는 모든 것들이 유행하고 또한 소비된다. 이러한 것들에 있어 리틀피플은 다만 적절한 유행에 동참하는 존재로 화한다.존재마저 소비하는 존재가 리틀피플이다. 모든 악행의 비은폐를 통해 모두를 공범화하는 것이 리틀피플의 기획성이다. 적대의 방식도 동일하다.하루키는 이러한 리틀피플을 사유한다. 공모자이자 피해자인 집단심성의 소유자, 그들이 만든 세계의 회색빛 화상을 하루키는 오웰의 어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자기파열적인 개인들의 비의지적 연합(주로 소비의 형태로 동참하며)이 파생시키는 거대권력과 그로 인한 자기파열적인 절망적 상태, 현대인이 직면한 실존이다.오늘날 우리 사회 일부는 빅브라더의 재림을 염려하지만, 간헐적으로 보이는 시대착오적인 빅브라더의 우스꽝스러운 회귀적 작태에 조소를 보이는 것이 다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병증이 빅브라더에서 기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오웰의 진단처럼 거대권력을 기획하는 소수자 빅브라더가 병증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었다면 해법은 간명했을 것이다. 유수한 주인을 향한 노예의 전복 역사를 따르면 될 터이다.하지만 리틀피플의 병증과 그에 따른 진단은 명백히 다르다. 따라서 해법은 빅브라더를 향한 적대가 아니라 리틀피플의 자기 사유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소비하는 존재가 아닌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개인, 비의지적 연합과 유행에 따른 영합이 아닌 서로 주체적 연대자로서의 개인을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요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웰의 해법처럼 빅브라더를 비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리틀피플의 존재 방식을 재사유해야 한다는 하루키의 제안이며 또한 그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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