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폭력’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불순한 의도로 표정이나 눈빛으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여 여성의 몸의 일부 또는 전부를 쳐다보는 행위로, 대상이 된 여성은 불쾌감을 느끼거나, 심하게는 분노와 자괴감을 동반하기도 하고, 성적 수치심 등으로 표출이 된다는 점에서 ‘시선강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부 페미니스트 중에서는 이러한 시선강간을 실제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제화시켜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과거에는 ‘남성들의 성희롱적 시선’, ‘노골적 시선’, ‘음흉한 눈초리’ 등으로 표현되다가 ‘시선강간’이라는 단어로까지 표현하게 된 것인데, 일각에서는 ‘강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있지만, 여성이 느끼는 불쾌감의 정도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더욱이 2000년 전 예수가 이미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내가 보는 자유, 볼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떻게’ 보는가가 빠져있다. 보는 자유는 있어도, `어떻게`보라는 것까지는 자유로 주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는 지에 따라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이 ‘어떻게’를 의식하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크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돌맹이 하나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선의 원인을 옷차림 등으로 여성을 탓하는 경우도 있다. 그냥 ‘눈길이 간다’와 ‘위아래로 훑어본다’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 옷차림이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입은 것이 아닐뿐더러,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쳐다보는 대상화된 시선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2차 가해라는 것쯤은 이제는 ‘상식’이 되었다.권력관계에서 우위를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보내는 시선이 자유로울 수는 있어도, 그 자유가 오남용될 때에 제재를 가하는 장치가 있던가? 이런 식의 접근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이미 간단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망각하기 일쑤다. ‘역지사지’ 말이다. 시선의 대상이 상대방이 아닌 ‘나’로 대입시켜보면 사실 정답은 간단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남성이 따로 없고, 여성이 따로 없다.일상에서 이러한 시선폭력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피해자는 혼자 끙끙 앓다가 잊어버리려 노력하기도 하고, 울음으로 벗어나려고도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피해자’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의 탓 인양 자책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러한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잊혀질만할 때면 다시금 일어나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나와 같은 사람이고, 당신과 같은 인간이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곳에서 당사자가 아니라 관심을 가지지 못할 수도, 아니면 인식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와 당신도 가해자와 피해자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거나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나와 당신의 자녀가 피해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폭력`으로 인식될 때, 문제가 `문제`로 인식될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누구도 당신의 시선을 금지하거나 제재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자유를 이용해 상대를 고통스럽게 할 권리가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