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고, 고통 받고, 느끼고사랑하는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본 것을 상상하며 그리지, 보지지 않는 것을 그대로 그리진 않겠다.- 뭉크의 말뭉크만큼 인간의 내적인 상처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느끼고 또한 그 아픔의 치유를 위해 사랑에 천착했던 화가가 있을까요? 그의 말처럼 그는 숨 쉬고 고통 받고 느끼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사람의 그림을 그립니다. 고통 받았지만 사랑을 갈망하는 인간의 심연을 그처럼 잘 묘사한 화가도 드물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절규’가 그러하죠. 그러나 저는 ‘절규’ 보다 이 그림이 가장 뭉크가 그리고자 했던 그림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뭉크의 `절규`가 나오기 한 달 여전 그렸다는 사랑과 고통이라는 작품입니다. 흔히들 ‘흡혈귀’라 알고 있는 그림이지만, 폴란드의 극작가인 프시비셰프스키에 의해 흡혈귀라 명명되어 잘못 전해졌을 뿐 뭉크는 이 그림의 제목을 사랑과 고통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흡혈귀가 아닌 숙명적으로 고통을 수반한 사랑을 하고 있는 남녀의 모습으로 이 그림을 살펴보면, 많은 것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남성은 뭉크의 자화상 같기도 합니다. 아픔에 있어 이기적인 그는 여자의 품에 안겨, 추후를 가늠할 길 없는 깊은 폐허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인의 품에서 자그만 위안을 얻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여인에게 그 폐허는 어떤 의미일까요? 이 그림을 볼 때면 신경숙님의 글이 떠오릅니다.인간에게는 자신만의 폐허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인간의 폐허야말로 그 인간의 정체성이라고 본다. 아무도 자신의 폐허에 타자가 다녀가길 원치 않는다. 이따금 예외가 있으니 사랑하는 자만이 상대방의 폐허를 들여다 볼 뿐이다. 그 폐허를 엿본 대가는 얼마나 큰가. 무턱대고 함께 있어야 하거나, 보호자가 되어야 하거나, 때로는 치유해줘야 하거나 함께 죽어야 한다. 나의 폐허를 본 타자가 달아나면 그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어느 한 순간에 하나가 되었던 그 일치감의 대가로 상처가 남는 것이다. - 소설가 신경숙그래서 일까요. 여인에게 있어 사랑은 곧 고통의 또 다른 양면인 듯합니다. 그의 폐허를 본 까닭으로 그의 생애에 영혼의 습기로 영원히 남아야만 하는 그녀는 그 깊은 폐허를 감당 할 수 있었을까요. 언젠가 떠날 지도 모를 불안 뒤, 반드시 다가올 그녀의 부재, 그에게도 그것은 사랑이자 고통인 듯합니다. 함께 있음으로 위안 받을 수 있는 사랑은 어느 날 예기치 않은 타자의 달아남으로 인해 깊은 상처로 변할 것이라는 불가항력의 예견. 뭉크는 그래서 절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한 달 절규를 그린 뭉크에게서 부재의 고통이 저의 감성 속에 은밀히 다가왔던 것은 이 그림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창에 낀 습기 마냥 선명하지 않은 존재의 흔적에 멀미를 할 듯한 기분. 그 아득한 부재와 아련한 존재의 습기가 혼재된 미친 듯한 요동은 뭉크에게서 자연의 절규를 듣게 하는 동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돌연 하늘이 피로 물들고, 피처럼 칼처럼 솟아 오른 구름을 바라보며, 자연을 관통하는 커다란 절규를 느꼈던 뭉크에게 이 그림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어쩌면 사랑과 고통이라는 이 그림이 뭉크의 깊은 폐허, 즉 한 인간의 가장 진솔한 정체성을 노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글쓴이|이재호현직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 철학, 미학, 역사, 교육학 등에 관심이 많으며, 이를 공부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즐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