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이자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한 의사로서, 이일선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과 같이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이후 당대의 불모지였던 울릉도에서 ‘울릉도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삶을 살았다. 지난 호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끝나가던 무렵 이일선 목사가 소명을 받아 신학교에 입학하고 신일교회를 개척한 이야기와 한국전쟁 당시에 의대에 진학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의사로서의 이일선 목사의 삶에 대해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다.| 새로운 헌신의 길, 의사 이일선이일선 목사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이후, 존경해오던 슈바이처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1956년 2월 12일 슈바이처로부터 자신을 한국에 소개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답신을 받고, 마침내 초청을 받아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동역할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이일선 목사는 1958년 11월 11일부터 약 1년간 신일교회 당회의 허락을 받고 해외 연수의 길을 떠났다.이일선 목사가 랑바레네 병원에서 슈바이처와 동역한 기간은 1959년 2월 초부터 4월까지 대략 3개월이 채 못 되는 기간이었으나, 그 기간은 이일선 목사의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줄 만큼 인상적인 시기였다. 이일선 목사는 랑바레네에 머무는 동안 슈바이처와 평생의 동역자 관계가 되었으며, 헤어지기 직전 슈바이처로부터 ‘디모데’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일선 목사는 이를 슈바이처가 자신을 영적인 아들로 여긴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격해 하였다.해외 연수의 나머지 기간에는 해외에서 열리던 한센병 학회, 한센병 사업 및 재활센터 시찰, 덴마크 국제민중대학 연수 등의 일정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면을 보아도 이일선 목사가 향후 의사로서 활동하는 것 이외에도 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센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농촌공동체 설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의 슈바이처1959년 12월 8일,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일선 목사는 신일교회 성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후 이일선 목사는 1960년 4·19혁명을 경험하며 역사의 격변기에 기독교 지도자의 올바른 역할과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을 강조하다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961년 5월, 울릉도 사역을 위해 신일교회를 떠났다. 왜 이일선 목사는 신일교회 목회와 전국의 한센병 환자 치료보다 울릉도 사역의 길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는 자신이 강조해 온 기독교 지도자로서의 사회 변혁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이일선 목사는 1957년 여름에 포항의 환자들을 치료하러 갔다가 당시 울릉도에서 선교하던 안대옥 전도사를 만났다. 안대옥 전도사는 이일선 목사에게 울릉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이에 이일선 목사는 1957년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울릉도를 방문하여 많은 결핵 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들을 목격하고 그들을 치료하였다.1958년 4월, 이일선 목사는 울릉도의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를 돕는 수녀들과 함께 포항에서 ‘용마호’라는 목선을 타고 울릉도로 향했다. 그런데 이 배가 울릉도로 가던 중 큰 태풍을 만나 3일간 표류하다가 북한 원산 앞바다까지 밀려가고 말았다. 생존에 대한 희망이 거의 사라질 무렵이었지만 이일선 목사는 무릎을 꿇고 평안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생을 마칠 수 있는 신앙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때 때마침 역풍이 불어 용마호는 기적적으로 울릉도 천부에 배를 댈 수 있게 되었다. 육지에 발을 딛고 선 이일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하나님, 나는 울릉도 바다에서 이미 죽은 몸이올시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나를 살려주셨으니 이제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의사가 없는 이 섬에서 내 일생을 바쳐 봉사하겠습니다.1959년 귀국 후 신일교회 담임목사와 신일의원 의사로 일하며 동분서주하던 이일선 목사는 울릉도 사역에 대한 준비를 마친 후 1961년 5월 31일, 마침내 울릉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곧바로 울릉도 도동에 셋집을 얻어 울릉도의원을 개원하고 간호원 1명, 조수 2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이일선 목사는 울릉도에서 의료 사역을 하는 동안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선교사나 선교 단체, 교회나 개인의 후원을 받지 않았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사역이 아니라 후원하는 기관이나 개인의 선교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병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각처에 있는 친구들과 기독교 봉사회 등에서 보내준 구호품과 소액을 후원하는 많은 후원자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일선 목사의 울릉도 3대 사역이일선 목사가 1961년 울릉도에 왔을 당시에 당시 울릉도 인구는 2만여 명이었는데,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울릉도는 결핵 환자가 800명, 한센병 환자가 68명, 기생충 감염률이 80%에 이를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일선 목사는 이런 어려운 현실에서 단순히 병자를 고치는 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일선 목사는 울릉도에서 사역을 하면서 매년 자신의 사역을 정리해서 후원자들과 동역자들에게 「울릉도 편지」(Ullung-do Letter)라는 이름으로 발송했다.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이일선 목사가 울릉도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사역했는지 알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주요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의료사업(medical service)•1961-63년 이일선 목사가 공식적으로 울릉도에서 진료를 시작한 것은 1961년 6월 1일이었는데, 「울릉도 편지」에 따르면 1963년 10월 31일까지 총 6,782명(1963년 당시 울릉도 인구는 대략 2만 명)의 환자 카드를 작성하였다.•1965년 총 2만 1,000명의 울릉도 주민 중에서 1만 1,652명의 환자 카드를 작성하였으며, 1년간 총 1만 4,392명의 환자를 진료하고 83명의 환자를 수술하였다.•1971년 하루에 3명의 의사와 8명의 스태프들이 환자 70-80명 정도를 진료하고 있었고, 숙원 사업인 병원 신축은 기초 공사를 마무리하였다.•1976년 도동에 있는 울릉도의원 본원에서는 한 해 동안 총 2만 143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천부동에 있는 분원에서는 하루 15-20명의 환자를, 그리고 저동 분원에서는 하루 25-34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새 병원 건축 사업은 외관을 마치기는 했으나 내부 공사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몇 년이 더 걸려야 마칠 수 있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2) 전도사업(evangelical service)•1963년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내원객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기독교 책자(「승리의 삶」, 「기독교 가정」)를 비치하여 무료로 제공하였다.•1965년 울릉도에는 교회의 숫자는 많아지고 있으나 교회의 재정 상황이 매우 열악하고 또 전임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이일선 목사는 주일이면 교파에 관계없이 섬에 있는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필요하면 설교를 하거나 헌금으로 그 교회들을 돕는 사역을 초기부터 계속하였다.•1971년 당시 전국의 복음화율이 10%인 데 비해 울릉도의 복음화율은 30% 정도나 되었다. 그 결과 울릉도에서는 미신을 섬기는 습속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기독교 복음의 좋은 영향력이 점점 퍼져서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었다.•1976년 이일선 목사의 건강 문제(디스크 수술로 보행이 불편함)로 주일마다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는 사역은 하지 못하고, 병원 안에 채플실을 마련하여 주일마다 환자와 환자 가족, 병원 스태프들이 함께 예배드렸다.3) 사회사업(social works/community development and social relief activities)•1963년 오길화 사모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 홀로된 여인들과 병든 아이들, 집 없는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서 ‘울릉도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있고, 실제로 이일선 목사도 “울릉도에 가면 저보다 제 아내가 훨씬 인기가 더 좋습니다.”라고 말했다.•1965년 이일선 목사는 새해가 되면 섬 주민들의 건강을 위해서 달력을 배포하면서 지켜야 할 새로운 생활 습관(‘깔끔하게 정리된 환경에서 정돈된 삶을 살아가자’와 같은 7가지 생활 준칙)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는 10가지 생활 준칙(자유, 우정, 지식, 신앙 등)을 제시하며 건강하고 바른 생활에 대한 교훈을 계속 고취시켰다.•1971년 12명의 할머니들과 13명의 가난한 아이들, 한센병 환자들, 영양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우유나 음식, 의복 등을 지원하고 있으며, 당시 울릉도에는 깨끗한 물이 섬 전체에 보급되어 물 때문에 생기던 질병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1976년 짚으로 만든 문, 나무로 만든 막사 같은 움막집들이 슬레이트나 아연으로 도금된 지붕과 유리창이 나 있는 집으로 대체되었고, ‘동물 은행 프로젝트’는 좋은 결실을 맺고 있으며, 마을마다 소, 돼지, 가금류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이일선 목사가 울릉도에서 감당한 18년의 사역은 예수의 세 가지 사역(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신 사역)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이일선 목사는 건강하고 도덕적인 삶의 태도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가르쳤고, 병원 내원객뿐만 아니라 주일이면 교회를 방문하여 늘 교회를 온전히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의사로서 도동 본원뿐만 아니라 거리가 먼 섬 주민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 저동과 천부동에도 분원을 세워 치료하는 사역에 최선을 다하였다.| 사역의 마무리, 주님의 품으로이일선 목사가 울릉도에서 18년간 이룬 업적은 ‘울릉도의 슈바이처’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업적의 이면에는 초기에 울릉도민으로부터 수없이 받아왔던 오해(예를 들어, 울릉도 돈을 다 쓸어가려고 왔다거나 울릉도에서 국회의원을 하려고 수작한다), 낯선 땅에서 지내는 외로움, 자녀들의 교육 문제, 병원의 재정 문제 등 엄청난 시련과 난관을 묵묵히 이겨낸 피의 흔적이 있었다.혹독한 시련을 잘 이기면서 최선을 다해 사역하던 이일선 목사 부부는 안타깝게도 그만 건강을 잃게 되었다. 1973년 10월 10일, 이일선 목사는 갑자기 허리를 삐끗했고, 결국 디스크 판정을 받아 수술을 받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뇨까지 재발하여 지팡이에 의존해야 겨우 걸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오길화 사모의 대퇴골이 골절되었고, 이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 1976년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부부는 둘 다 지팡이에 의존해야 걸을 수 있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부는 좌절하지 않았다. 여전히 욥을 묵상하며 다시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해 사역하였다.그런데 당시 신축 중이던 병원의 완공을 위해서 불철주야 수고하던 이일선 목사가 거짓 소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받는 일이 생겼다. 병원의 본관이 90% 이상 완공된 1977년 말에 누군가가 이일선 목사가 무면허 의사를 오랫동안 채용했고, 또 마약을 투약하고 판매했다는 허황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에 보도될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이 일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울릉도의 슈바이처’로 존경받던 이일선 목사가 받은 심적인 타격과 대외적인 이미지의 손상은 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이런 허황된 소문이 준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소문의 결과로 국내외의 후원이 대폭 줄어든 상황은 이일선 목사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아픈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허황된 소문의 출처에 대해서 지금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으나, 왜 병원이 거의 완공되던 시점에 이런 소문이 퍼졌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명확한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고 본다.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이일선 목사는 과연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오해와 허황된 소문으로 지치고 힘든 때에도 이일선 목사는 하나님 앞에 늘 기도했으며, 오르간을 연주하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그 모진 시절을 견뎌냈다. 또한 이런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이일선 목사는 여전히 앞날을 바라보며 사역의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두어 가지 새로운 계획이 있었다. 첫째는 울릉도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섬을 물색하여 울릉도 모델을 시행하려던 것이었고, 두 번째는 남은 생을 슈바이처 박사가 사역하던 랑바레네 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돌보며 지내는 것이었다.지쳐 있으면서도 이런 계획을 구상하고 있던 이일선 목사 부부에게 딸 애열은 미국 오마하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우선 휴식을 취하라고 권면한다. 그 권면대로 1979년 12월 2일 이일선 목사 부부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 성도들의 요청으로 한인교회를 맡아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큰 교통사고를 당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치료 중 성대에 문제가 생겨 정확한 의사표현이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이일선 목사는 귀국하여 서울과 울릉도를 오가며 생활하다가 딸 애열의 거듭된 권유로 미국 LA에서 함께 지내던 중 1995년 2월 1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글을 마치며: 이일선 목사의 사역에 대한 평가와 오늘 우리의 과제지금까지 살펴본 이일선 목사의 신앙과 생애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일선 목사를 ‘기독교 복음에 바탕을 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고 말하고 싶다. 이일선 목사는 신학교 입학, 의사로서의 소명, 울릉도 사역에 대한 헌신 등 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계시의 경험을 따라 평생을 살았다. 그래서 이일선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갔다는 의미에서 훌륭한 기독교 복음주의자였다. 목회뿐만 아니라 의사로서, 농촌 운동가로서 그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함께 완성하고자 애쓴 온전한 복음주의자였고, 기장과 예장이 분열된 후에도 어느 교파도 등지지 않은 채 협력하였고 울릉도 사역 중에도 교파를 막론하고 늘 연대에 힘쓴 에큐메니스트였으며, 국내외 수많은 세미나에 참석하고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수많은 강연회를 열었으며 일곱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항상 배우고 연구하는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였다.그러면서도 중학교 시절 책으로 만나 평생의 멘토로 존경한 슈바이처 박사처럼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로 살았다. 그저 감상적으로 이상을 꿈꾸는 것에 머물지 않았으며 자신이 지향하는 이상을 현실 속에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온 삶을 살아냈다. 이상촌 운동에 몸담았으면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변혁적인 농촌공동체를 울릉도에서 이루고자 하였으며, 목회와 의사 생활을 병행하면서 전인적으로 영육이 강건한 삶을 이루게 하고자 노력하였다.이일선 목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따랐던 한 신앙인이었다. 동시에 이일선은 덴마크 농촌을 부흥케 했던 그룬트비를 따라 한국에 이상촌을 건설하려 하였고,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다미앵 신부를 따라 그들을 섬겼다. 또 소외된 자의 의사였던 슈바이처를 따라 울릉도로 향했고, 비폭력 무저항을 외쳤던 간디를 따라 울릉도에서 받은 숱한 오해와 비난을 묵묵히 견디며 대적하지 않았다. 이토록 많은 일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또 위대한 인류의 성인들을 따라가고자 애쓴 삶이었기에 이일선 목사의 삶은 늘 힘들고 피곤했다. 필자가 쓴 책의 제목처럼 ‘등에는 십자가가 있었으나 입으로는 늘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여가란 없다. 피로가 뒤따르고 있다. 등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입에는 노래가 있다. 주님과 함께 일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와 같이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한 지혜이며 또한 예술이기 때문이다.이일선 목사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주제가 있겠으나, 그가 쓴 『이상촌』이라는 책이 촉발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문제에 대해 보다 준엄하고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다. 또한 이일선 목사가 추구하고 건설하고자 했던 공동체와 이일선 목사가 영향을 받은 슈바이처, 그룬트비, 간디, 다미앵과 같은 인물들이 지향했던 사회 변혁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오늘날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적용할 수 있는지 연구되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일선 목사를 통해서 목회자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또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에큐메니컬 연대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연구할 수 있다. 교회와 사회를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일선 목사를 재조명하는 다방면의 노력이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 큰 유익을 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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