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누구에게나 특별한 조직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 뜻하지 않은 통과의례를 거치기 마련이다. 필자에게는 대학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 때 그러한 순간을 맞이한 기억이 있다. 그날 나와 한 조를 이룬 동기들은 선배들이 학내에 미리 설계한 코스들을 돌며 각각의 코스에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물론 그 임무는 혼자만이 아니라 다 같이 달성해야 하는 것이기에 쉽사리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번번이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구호를 외쳐야 하는 벌칙을 치러야 했다. 그때 나와 같이 고난과 역경의 서사를 쓴 동기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조금 늦게 내 소식을 전하자면, 그 이후 나는 한국문학에서 공동체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을 쓰면서 공동체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성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두 눈을 찌르는 찬란한 빛 속에 공동체를 가둬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공동체는 어떤 단일한 신념을 기반으로 구축한 집단과 같은 실체였을 것이다. 우린 거기에 조금의 어둠도 침투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두르고, 그 주위에 단단한 벽돌을 쌓아 올리고, 철저하게 안을 봉쇄할 수 있는 문을 달았다. 그 속에서 개인은 성스러운 성을 수호하는 일개의 병사였고, 휘황찬란한 깃발 아래 똑같은 구호를 외쳐야 하는 기사에 불과했을 거다. 하지만 공동체는 오히려 캄캄한 어둠에 잠겨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정전된 방에서 떨리는 두 손으로 공포에 질린 두 눈을 밝히는 것처럼, 공동체는 각자의 두 손으로 더듬어가며 발굴될 때까지 어둠의 저층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는 단순히 조직이나 단체와 같은 실체이기보다는 무미건조한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구현되어야 할 공동(共同)의 원리에 가깝다. 범박하게 말해, 공동체는 개체의 축과 전체의 축에 놓이는 두 범주가 상대를 각자의 영역으로 환원하지 않도록 길항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이것이 개성, 자유, 협동 등의 가치에 따라 서로 공명함으로써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룬다. 이때 어둠 속에서 발굴된 공동체는 우리의 눈앞에 눈부신 섬광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기 마련이다. 최근 서구에서는 파시즘 혹은 유사 파시즘(Para-fascism)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공동체를 반성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대안을 탐색하려 한 결과물이 제출되고 있다. 그에 대한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반딧불’의 공동체(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무위의 공동체’(장-뤽 낭시), ‘도래하는 공동체’(조르조 아감벤) 등 매력적인 개념을 언급할 수 있겠다. 물론 이 글은 각 학자의 사상체계를 더듬고 이 개념들을 소개할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것들은 공통적으로 ‘안’으로의 강화를 통해 소속감이나 결속력이라는 전리품을 얻고 각자의 잠재성을 사장(死藏)시키는 기존의 공동체와 달리, ‘바깥’으로의 사유를 통해 각자의 잠재성을 무한하게 현실화할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려 했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실제로 우리의 역사적 현장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의 가능성을 실험하려 한 흔적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을 텐데, 아래의 시는 바로 우리의 관심사에 응답하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우리 두 사람은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았어라.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어.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오오 빛나는 태양은 내리쪼이며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는 넘치는 은혜여,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속을 차지하여라.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새라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다시 한 번 활기있게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호미 들고 들어갔어라, 가지런히 가지런히,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향상이여.― 김소월, 〈밭고랑 위에서〉, 《진달래꽃》, 매문사, 1925   위의 시는 단순히 평화로운 농촌공동체의 전형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을 안고 있다. 그건 우리의 통상적인 선입견을 비켜나는 공동체의 초과분으로 인해 발생한다. 첫 번째로, 이 시에서 공동체는 오히려 ‘나’ 바깥의 경험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생명’의 흐름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마도 정황상 농부라고 생각되는 ‘우리 두 사람’은 ‘빛나는 태양’이 내리쪼이는 ‘자애의 하늘’과 날마다 ‘새로운 환희’를 지어내는 ‘땅’ 사이에 거주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서구 낭만주의의 흔적을 발견하든, 전통적인 기 사상의 흔적을 발견하든, ‘우리 두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기에 ‘살아 있는 몸에서 넘치는 은혜’를 느낄 수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이들 인간의 고유한 가치는 이들의 바깥에서 열리는 전체적인 형상과 동떨어질 수 없다. 두 번째로, 이 시에서 공동체는 오히려 ‘나’의 노동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생명’의 표현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시에서 ‘우리 두 사람’이 일하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을 동일한 층위에 두고 있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노동은 흔히 생각하듯 임금의 소유를 위해 인간 자신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삶에 대해 자발적인 역량을 발휘하는 이상주의적 의미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을 통해 삶에 관한 앎을 생산하게 될 때,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가. 이 순간 우리는 이들의 몸속에 켜진 생명의 기쁨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공동체의 섬광과 연결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과거의 향수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미지를 향한 공동체의 모험을 넌지시 말해주는 것 같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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