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류 과학사를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한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 무엇인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재치를 발휘한 적 있다.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있을 때는 한 시간이 마치 1초처럼 흘러갑니다. 그런데 뜨거운 난로에 손이 닿을 때는 1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이는 우리에게 시간이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황과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우리 각자에게 시간을 근사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처방을 요청하는 것 같다. 그중 하나로 꿈을 들 수 있을 텐데, 꿈이야말로 나날이 시간을 살찌우는 처방이 아니고 무엇인가 말인가. 이 글에서 문득 꿈을 시간의 식탁 위에 초대하게 된 것은 얼마 전 우연히 신문 기사에서 접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연유하였다. 이 설문조사는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주관으로 작년 중반경 한 달 좀 넘는 기간 동안 전국 초·중·고 1200개교의 학생 2만 3300명, 학부모 1만 2202명, 교원 28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바로 이들에게 주어진 질문은 ‘당신의 희망 직업은 무엇인가’였다. 그 결과 교사, 의사를 비롯하여 컴퓨터공학자, 소프트웨어개발자, 생명과학자 등 시대의 추세를 반영하는 직업들이 순위에 올랐다. 물론 순위와 별개로 그들이 선택한 모든 직업은 나름의 각별한 의미를 띠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때 필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학생보다 거기에 응답하지 못한 학생이 더 많았다는 것, 즉 희망 직업을 딱히 가지지 못한 학생이 더 많다는 사실에 다소 놀랐다. 이는 결국 새하얀 도화지에다 자기 미래의 모습을 그리지 못한 학생이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 순간 문득 필자의 뇌리에 아래의 시가 스쳐 간 건 왜일까. 그건 그 누군가가 쓰지 못한 시를 자신이 대신해서 쓸 뿐이라는 시인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반복적인 표현과 구조에 의해 이루어진 아래의 시는 앞서 언급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일종의 시적 주석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나무 그늘에 앉아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나무 그늘에 앉아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 1998 총 2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각각 "그늘이 없는 사람"과 "눈물이 없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그늘"과 "눈물"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내가, 즉 시인이 생각하는 것이며 사람에 따라 그 요소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시인이 자기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진실을 시인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시는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갔거나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것을 보게 만드는 눈을 제공하니까 말이다. 첫 번째 연에서 그는 강한 부정을 통해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강한 긍정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그늘"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우리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에서 찾을 수 있겠다. 우리는 한 번쯤 뙤약볕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늘에서 무더위를 달랜 적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그늘은 쉼이고 편안함이고 여유였을 테지만, 그건 나무가 가진 가장 특별한 점이기에 유의미하다. 바로 나무는 자신의 특별한 그늘을 그 누군가에게 나눠줌에 따라 그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신선한 눈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은 자신의 유일무이한 고유성을 발휘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닐까. 이쯤 되면 나무가 우리에게 선사한 눈은 현재 나무가 찬란한 녹음을 드리우기까지 연마해온 시간을 향하게 된다. 즉, 나무가 그늘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가지를 뻗어서 하늘을 장악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햇볕, 비, 바람, 새의 온기와 같은 요소가 나무의 성장에 개입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직간접적으로 그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밑거름으로 했을 것이다. 바로 나무의 그늘에는 그러한 모든 이의 그늘이 녹아있고, 그것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아무렇지 않게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늘은 고통과 인내와 성숙과 베품을 의미하는 삶의 지혜다.   두 번째 연에서는 역시 강한 부정을 통해 눈물을 사랑하는 사랑에 대한 강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눈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미 1연에서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라는 구절에서 암시를 얻은 바 있다. 이는 우리에게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니 "기쁨도 눈물이" 있어야 기쁨만의 고유성을 발하게 될 테고, "사랑도 눈물"이 있어야 사랑만의 고유성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러한 고유성이 상대편으로 인해 독자적인 빛깔을 띨 뿐만 아니라 상대편의 고유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 아닐까. 이런 연결성과 연대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 즉 통각(痛覺)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된다. 말하자면, 앞서 "햇볕"-"그늘", "기쁨"-"슬픔", "사랑"-"눈물"의 짝패 중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세상은 금세 삐걱거리기 마련이고 온통 먹구름이 내려앉은 곳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때 우리는 상실감과 슬픔에 휩싸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즉 타인의 아픔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니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은 눈물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진실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요컨대, 눈물은 슬픔과 기쁨과 연민과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삶의 지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설문조사 결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결국 희망 직업을 가지는 건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그 누군가에게 각별한 존재가 되기 위함은 아닐까. 그러니 시간을 살찌우는 건 나의 꿈이고, 그런 나의 꿈은 그 누군가의 시간을 살찌우기도 한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된 셈이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은 광활한 우주 속에서 그늘의 지혜와 눈물의 지혜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엿보았을 것이다.글쓴이|최호영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주로 비교문학, 사상사, 문화콘텐츠의 관점에서 현대시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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