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에 새겨진 인류의 꿈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누구이고, 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프랑스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의 말년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질문에는 물론 자아를 둘러싼 횡적인 축과 종적인 축에..
구원의 장소와 성찰의 장소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꿈꾼다. 그러면서 비속한 이곳과는 다른 자유로운 곳을 내다보지만, 그곳은 우리의 시야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요원하기만 하다. 어쩌면 구원이란 까마득한 먼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
[우리가 잘 잊고 사는 몸의 감각]우리는 자주 몸에 속고 산다. 지금 눈앞에 있는 현상이야말로 사실이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실의 정확함이 세계의 진리를 증명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꼭 삶의 진실에 가닿는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괴물처럼 비대해진 눈을..
혁명. 우리가 이 사회에서 불거지는 부조리함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상황이 올 때 종종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극적인 사회 변혁의 계기를 혁명에서 찾는 데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 혁명이 역사적인 사태가 아니라 창조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가 있다...
고통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가리키는 번지수이다. 우리는 크든 작든 예기치 않은 재난에 노출되어 있거니와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 사회의 어둠이 드러나는 재난을 심심치 않게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고통이 잠재성을 가지게 될수록 우리의 눈앞에는 너무..
인간을 이른바 사회적 존재로서 바라볼 때, 색깔은 언어와 동등한 위상을 가진다. 우리는 언어와 색깔을 통해 세계를 특정한 의미로 분류해왔고, 또 그렇게 분류된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와 색깔에 특별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
* 이 글은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영화 〈그녀 Her〉와 슬릿스코프·카카오브레인의 인공지능 시집 《시를 쓰는 이유》를 몽타주(montage)로 하는 허구적 에세이이다. 이 글에 나오는 사만다는 영화 〈그녀 Her〉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의 이름이며, 테오도르는 그..
한미약품(사이언스)의 경영권 분쟁, 이른바 ‘모녀와 형제’의 대결을 나는 남달리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중이다. 아직 출간 시기를 미정하고 있지만, 한미약품을 창업해 “R&D가 제약기업의 생명”이라 고집하고 실천하고 전파하며 우리나라 제약산업에 새 지평을 열어젖..
평화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오롯이 한평생을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 있다.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며,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이 말은 그가 19..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은 이제 정말 옛말이 되어버렸다. 현대사회는 그 말에 담긴 세월의 무게를 단숨에 폐기하듯 놀라운 속도로 인간의 감각과 인지능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매일 복잡다단한 상황에 내몰리고, 머잖아 발등에 떨어질 미래조차 예측..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을 창안해낸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한 언론인과의 인터뷰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있다.역사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는 것, 말하는 것, 역사를 말하..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류 과학사를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한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 무엇인가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재치를 발휘한 적 있다.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있을 때는 한 시간이 마치 1..
"모른 척 해줄께. 너에 대해서 무슨 얘기를 들어도. 모른 척 해줄께. 약속해주라, 너도 모른 척 해준다고. 겁나. 너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 같아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인 이지안(아이유)가 자신이 정당방위로 살인을 저질렀던 과거를 사람들에게 들킬까
살다 보면 평소에는 지극히 사소하던 것이 문득 특별한 것으로 변할 때가 있다. 유리창이 그러하다. 당신이 좀처럼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슬픔에 휩싸일 때 유리창은 당신에게 충만한 공간으로 변주한다. 당신이 유리창만큼이나 무의미한 존재로 전락했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그럴..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전설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남긴 명언이다. 이 짧은 말에는, 우리의 인생을 마치 기름을 끼얹은 장작불에 비유하고서 우리가 거기에 가까이 다가서려다 다치지 말고 적절한 거리에서 그 온기를 쬐길 바라는 염려의..
12월은 어떤 점에서 인간의 한 여정이 다다르는 종착점이라 여길 만하다. 어느 순간 우리의 몸이 그것을 먼저 감지하고 있다는 걸 우리의 머리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우리가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지난 길목 위에 떨어져 있는 숨들을 뒤돌아볼..
이름이 하나의 상징이 된다는 건 불행한 일일지 모른다. 그건 아무도 가지 않은 수난의 길을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가 최후에 내던진 목숨은 오롯이 블랙홀과 같은 상징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름이 하나의 상징이 되는 건 특별한 ..
우리가 뿌리내리고 있는 일상은 마치 장미꽃과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는 고정된 루틴에 따라 삶의 공간을 영위해가고 형식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얽매이거나 비속한 돈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이에 대해 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이 있다. 경북 영천 출신의 이중기 시인이다. 사실 그에게 농부와 시인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동의어에 가깝다. 농부란 하늘과 땅의 말에 귀 기울이고 섬겨서 자기와 세상을 살찌우는 존재이니, 우주의 말을 받아적으며 자기와 ..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 2019년에 개봉된 엄유나 감독의 영화 〈말모이〉에 나오는 대사다. 잘 알다시피, 이 영화는 일제 말기 암흑기 상황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수호하고자 했던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작업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 사전..